HBM4, 핀 개수 두 배 늘면서
전력 소모와 발열 동시에 커져
코어 다이에 저전력 설계 적용
전력효율 40%ㆍ방열 30% 개선
설계·공정 최적화로 수율 확보

삼성전자의 고대역폭 메모리(HBM4) 양산은 단순히 ‘더 빠른 속도’를 향한 진군이 아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메모리 패러다임이 절대 성능에서 전력 효율과 공급 안정성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제 AI 반도체 전쟁의 승부처는 연산 속도가 아닌, 데이터센터의 운영 비용을 좌우하는 ‘전력과 발열 관리’라는 분석이 나온다.
12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양산 출하한 HBM4는 코어 다이(HBM을 구성하는 핵심인 D램을 수직으로 적층한 다이) 저전력 설계와 전력 분배 최적화로 전력효율과 발열을 개선했다. HBM4 데이터 전송 I/O(Input/Output) 핀 수가 기존 1024개에서 2048개로 두 배 늘어나면서 구조적으로 전력 소모와 발열 문제가 동시에 커진다. 데이터 이동량이 늘어날수록 전력 밀도가 높아지고 열이 특정 영역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현재 AI 서버에서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성능보다 전력 공급과 냉각 설비가 병목으로 작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코어 다이에 저전력 설계를 적용하고 실리콘 관통 전극(TSV) 데이터 송수신 전압을 기존 1.1V에서 0.75V로 낮췄다. 전력 분배 네트워크(PDN)도 재설계해 고속 동작 환경에서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 결과 전 세대 대비 에너지 효율은 약 40% 개선됐고 열저항 특성과 방열 성능도 각각 10%, 30% 향상됐다.
이 같은 변화는 AI 데이터센터 구조와 직결된다. HBM은 GPU 연산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지만 동시에 서버 전력 소모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전력 효율이 개선될 경우 동일한 전력 환경에서 더 많은 GPU를 운용할 수 있어 데이터센터 전체의 총소유비용(TCO)을 낮추는 효과가 발생한다. 업계가 HBM 성능보다 전력 효율을 핵심 지표로 보기 시작한 이유다.

공급 구조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HBM은 메모리 설계뿐 아니라 베이스 다이(HBM 적층 구조의 가장 아래에 위치해 전력·신호를 제어하는 기반 칩), 파운드리 공정, 첨단 패키징 기술이 동시에 맞물려야 양산이 가능한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패키징을 모두 갖춘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 설계와 공정을 동시에 최적화하는 설계·공정 통합 최적화(DTCO)를 적용하고 있다. 이는 수율과 생산 속도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구조라는 평가다.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공급 안정성 역시 경쟁 요소로 부상했다. 글로벌 GPU 업체와 AI 칩 설계 기업들이 HBM 공급 부족을 가장 큰 리스크로 지목하면서 생산 능력과 인프라 확보가 시장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선제적으로 확보한 클린룸과 대규모 D램 생산 능력을 기반으로 HBM 생산 확대에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평택사업장 신규 라인 역시 향후 HBM 생산의 핵심 거점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차세대 제품 준비도 병행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6년 HBM4E 샘플 출하를 시작하고 2027년부터는 고객 요구에 맞춘 고객 맞춤형 HBM 공급에 나설 계획이다. AI 가속기와 GPU 구조가 빠르게 다양화하는 상황에서 맞춤형 HBM은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평가된다. 결국 HBM4 양산은 메모리 성능 경쟁의 다음 단계가 시작됐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업계 관계자는 “속도를 넘어 전력 효율과 공급 역량, 고객 맞춤 설계까지 포함하는 ‘시스템 경쟁’으로 HBM 시장의 판이 재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