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AI 반도체 딜레마, 정부 손에 달렸다

“정부가 엔비디아로부터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량 확보한 것을 성과로 홍보하고 있는데,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합니다.”

최근 국내 한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대표가 내놓은 ‘웃픈’ 발언이다. 지난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행사 당시 정부는 엔비디아와 AI 생태계 구축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성과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블랙웰’을 무려 26만 장 확보했다는 점이다. AI 시장에서 엔비디아 GPU는 없어서 못 구할 정도의 핵심 자산인 만큼, 정부는 이를 APEC의 대표 성과로 내세우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기자가 만난 이 기업 대표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그가 이른바 ‘반(反) 엔비디아’를 외치는 국내 AI 반도체 진영의 선봉장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현재 자타공인 글로벌 AI 시장의 절대 강자다. 경쟁이라는 표현보다 독주에 가깝다. 전 세계 AI 가속기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어서다. 그는 이러한 엔비디아의 독주에 균열을 내겠다고 패기롭게 도전장을 던졌다. 해당 발언 속에는 한국이 진정한 AI 강국으로 도약하길 바라는 기대와, 국산 AI 반도체가 성공하길 바라는 절박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사무실 한켠에 전시된 이재명 대통령의 사인이 적힌 NPU 칩이 유독 외롭게 느껴졌던 이유다.

그렇다고 현 정부가 국내 기업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출마 선언 직후 첫 공식 일정으로 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 ‘퓨리오사AI’를 찾으며 국가 주도의 투자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후 정부는 국산 NPU의 조기 상용화를 목표로 AI 반도체 실증·사업화 관련 예산을 기존보다 794억 원 늘려 총 1103억 원으로 편성했다. 국산 AI 반도체 육성을 정책 기조로 삼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엔비디아와 협력하면서도 ‘반(反) 엔비디아’ 진영인 국내 AI 기업들을 동시에 키워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고려시대 서희의 외교담판급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보다 이제 반도체 경쟁이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국제전으로 자리한 만큼 자립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단기적으로는 엔비디아 GPU로 AI 경쟁력을 끌어올리되, 중장기적으로는 국산 AI 반도체가 설 자리를 넓히는 정책적 뒷받침이 이어져야 한다. 국내 AI 반도체 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결국 성패는 기술이 아니라 정부의 지속적이고 일관된 관심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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