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신종 위기' 규정… 곳간 넘쳐도 민생·기업은 '비명'

이창용 '양극화 위기' 경고...김대종 "1500원 돌파 시 실질 위기 시작"
수출입 기업 명암 극명...수입 물가 전가에 내수 기업·서민 비명
2% 지표 물가 무색한 장바구니...M2 과잉 속 고환율 고착화 우려
순대외채권국 건전성 이면...외환보유고 확충·금리 인상 필요성 제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연합뉴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의 원·달러 환율 상승을 국가 부도 위험이 아닌 '민생과 양극화의 위기'로 새롭게 정의했다.

외환보유액이 부족해 발생하는 전통적 의미의 금융위기는 지났지만, 고환율이 수입 물가를 밀어 올려 서민의 실질 소득을 갉아먹는 '생활형 위기'가 도래했다는 진단이다.

18일 이 총재는 전날 열린 기자설명회에서 한국이 순대외채권국으로서 대외 건전성을 확보하고 있어 과거 IMF와 같은 형태의 위기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현재의 환율 수준이 물가 상승과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가장 큰 위협은 환율 상승분이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로 전가되는 현상이다. 환율이 오르면 원유와 원자재, 농축수산물 수입 가격이 즉각 상승해 물가 상방 압력을 높인다. 한은은 내년 물가 상승률을 2.1%로 전망했으나, 고환율이 지속될 경우 이 목표 달성이 어려워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학계에서는 한은의 이러한 '건전성 프레임'이 자칫 안일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는 100% 에너지를 수입하기 때문에 환율 상승이 곧 모든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며 "이것이 바로 실질적인 위기"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서는 시점을 본격적인 위기 시작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특히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 수준이 경제 규모 대비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9200억 달러, IMF는 7000억 달러의 비축을 권고했으나 현재 한국의 보유액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대만은 GDP의 77%를 외환보유고로 채운 반면 한국은 23% 수준에 불과해 환율 방어 능력이 취약하다는 설명이다.

국내 기업들의 대외 투자 증가도 달러 유동성 확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 등에 따라 연간 2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직접 투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한은의 가용 현금이 이를 감당하기에 빠듯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는 원화 가치 하락을 부추기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 현장에서는 무역수지 흑자에도 환율이 떨어지지 않는 '디커플링' 현상에 주목한다.

박태형 우리은행 TCE지점장은 "수출 기업들이 관세 전쟁 대비와 해외 투자를 위해 달러를 원화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보유하거나 현지 유치하고 있다"며 "수출 호조가 원화 강세로 연결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 김장 관련 진열대. (연합뉴스)

한은의 통화 정책 실패가 환율 상승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박 지점장은 "현재 M2 통화량이 상당히 많아 원화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며 "시중에 풀린 과도한 원화가 수입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진단했다.

지표 물가와 체감 물가의 극심한 괴리도 위기감을 키우는 요소다. 정부 발표 물가는 2%대 초반이지만, 수입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장바구니 물가'는 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았다는 지적이다. 박 지점장은 이러한 괴리가 계층 간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핵심 원인이 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고환율은 경제 주체 간의 명암을 극명하게 갈라놓고 있다. 수출 기업이나 외화 자산 보유자는 환율 상승의 수혜를 보지만, 수입 원가 압박을 받는 내수 기업과 자영업자, 서민층은 실질 소득 감소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 총재 역시 "사회적 화합이 어려운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며 양극화 문제를 경계했다.

내수 기업의 경우 부품과 원자재 수입 비중이 높아 환율 상승에 따른 가격 경쟁력 확보보다 비용 폭등의 부담이 더 큰 실정이다. 김 교수는 "기업들은 1350원대를 적정 환율로 요구하고 있으나 정부와 한은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며 안일한 대처를 비판했다.

위기 타개를 위해 통화 스와프 확대와 국제금융시장 내 원화 비중 강화가 시급하다는 제언도 잇따른다. 김 교수는 미국·일본과의 통화 스와프 재개를 시급한 과제로 꼽으며, 원화의 국제금융이용률을 현재 0.1% 수준에서 대폭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지점장은 금리 인상 카드를 검토할 필요성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그는 "당장은 경제 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향후 회복 시그널이 확실해지면 원화 강세를 유도하기 위한 정량적인 금리 인상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도 환율이 드라마틱하게 떨어지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저출산·고령화와 글로벌 관세 전쟁, 국내 기업의 지속적인 해외 투자 등 구조적 요인이 원화 약세 압력을 지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의 환율 상황은 국가 부도의 공포보다는 '성장 양극화'라는 더 끈질기고 복합적인 위기로 진화하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단순히 대외 건전성 지표에 안주하기보다, 무너지는 내수 경기와 서민 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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