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정책이 멈추자 한국 산업의 의사결정 시계도 함께 섰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가 핵심 산업정책 추진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산업계 전반에서 의사결정 공백이 확대됐다. 반도체·인공지능(AI)·자동차·배터리·방산·조선 등 주력 업종은 투자·수출 로드맵을 확정하지 못한 채 불확실성만 키워왔다는 지적이다. 관세·세제 가이드라인, 보조금·승인 절차 등 정부가 제시해야 할 최소한의 정책 신호가 사라지면서 산업계는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 깜깜이 경영을 이어가야 했다.
올해 자동차 업계는 미국발 관세 충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정책 공백을 절실히 체감했다. 올해 3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외국산 자동차에 25% 관세 부과를 선언했을 당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관세는 국가와 국가의 문제”라며 정부-기업의 공동 대응을 강조했지만 협상 초기 정부 컨트롤타워는 부재했다. 우리나라는 경쟁국인 유럽연합(EU)·일본보다 늦게 관세 인하 협상에 도달하며 대응이 상대적으로 느렸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배터리 업계에선 인플레이션감축법(IRA)·EU 핵심원자재법(CRMA) 대응에 필요한 국내 세액공제·환급제 세부 규정 확정이 지연되면서 정책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국배터리산업협회는 세제 지침이 확정돼야 국내·해외 설비투자 비중을 결정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요구했고, 업계에서는 “속도가 경쟁력인데 정책이 늦어지면 글로벌 투자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랐다.
방산 패키지 수출에선 폴란드 K-무기 패키지 협상 과정에서 금융·보증 조율이 늦어지며 일부 일정이 뒤로 밀리기도 했다. 중동 지역 일부 프로젝트에서도 면허 승인 지연에 따른 일정 조정 사례가 보고됐다. 조선·해양플랜트 업계는 친환경선박 보조금·금융지원 기준 확정이 지연되며 시장 혼란이 심화됐다고 토로한다. 조선사들은 산업통상부·해양수산부에 “보조금 기준이 명확해야 선사와 최종 가격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전달한 바 있다.
전력 인입과 입지 기준의 불안정도 문제다. 지난해부터 대규모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일부 산업단지의 인입 처리가 지연됐다. 반도체·파운드리·AI 기업은 전력 배분 계획이 늦어지면 신규 라인 증설 시점이 모호해진다고 우려했다. 업계 관계자는 “전력·입지 지침은 기업이 임의로 조정할 수 없는 영역”이라며 “가이드라인이 비어 있으면 투자 판단도 보수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산업계는 비상계엄 이후의 시간을 ‘정책 신호가 증발한 기간’으로 평가한다. 핵심 분야의 정책 공백이 길어지며 기업들은 법률·컨설팅·협상 비용 등 추가 부담을 떠안았고 해외 파트너와의 일정 조율이 지연되면서 보이지 않는 경제적 비용 증가에 직면해야 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투자도, 로드맵도, 정책도 모두 멈춰 있던 시간이 길었다”며 “불확실성 비용이 조용히 한국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