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계의 주인' 윤가은 "고통과 슬픔 안고도 살아갈 의미 있어"

※ 인터뷰 내용 중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적관객수 13만명 돌파⋯올해 한국 독립예술극영화 1위
영화 인기 힘입어 각본집 출간, 영화 여운 즐기는 '확대경'
10년간 청소년 영화 만든 윤 감독 "꼭 뭔가 될 필요 없어"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바른손이앤에이)

카메라는 무언가를 찍는 도구다. 달리 말하면, 카메라는 배제의 미학을 생성하는 장치다. 생의 무수한 순간 가운데 하필 그 시공간을 포착하기 때문에 화면에 담기지 않은 세계가 비로소 생겨난다.

그런 점에서 영화 '세계의 주인'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세계와 인물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시공간의 이미지까지 서사의 일부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세계의 주인'은 과거 성폭행 피해를 겪은 여고생 '주인'(서수빈 분)이 자신의 소중한 일상을 되찾아가는 시간을 그린 영화다. 카메라는 주인이 스스로 회복을 일구어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듯 담아낸다.

지난달 22일 개봉해 현재까지 13만 명 이상의 관객수를 동원한 '세계의 주인'은 올해 한국 독립예술극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각본집이 영화 개봉 직후 바로 출간됐다.

영화를 연출한 윤가은 감독은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관객이 영화의 물성을 책이라는 매체로 체감할 수 있었으면 했다"며 "또 각본집에는 있지만, 영화에 담기지 않은 장면들이 좀 있다. 그런 대목을 비교해서 본다면, 영화와는 또 다른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밝혔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윤 감독은 "각본집을 통해 영화가 감독 한 사람의 작업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어쩌면 '설계도'에 불과한 각본이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과 스태프들의 축적된 노하우, 현장에서의 수많은 우연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완성되는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각본집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초라해 보일 수 있는 각본이 어떻게 영화로 변해가는지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라며 "그 과정을 드러내는 일이 결국은 내 어깨를 조금은 가볍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갈수록 든다"고 말했다.

각본집은 영화의 해설서나 확대경으로 작동할 수도 있고, 또 하나의 독립된 텍스트로 기능할 수도 있다. 이에 관해 윤 감독은 영화가 '시간예술'이라는 점을 먼저 짚었다. 그는 "영화는 정해진 시간 안에서 한 인물이 어디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보여줘야 하고, 그 변화가 관객에게 납득돼야 한다"라며 "글로 읽을 땐 자연스럽던 흐름도 영화로 옮기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곁가지가 너무 많아져 결국 가지치기를 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글을 이미지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영화에 담기지 못한 장면이나 인물에 관한 설명이 각본집에는 조금 더 남아 있게 된다는 게 윤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 부분은 왜 이렇게 점프하지?'라고 느꼈던 지점들을 각본집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득 한 남학생이 주인을 툭 치고 지나간다. 가만히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주인. 남학생을 잡으러 쫓아간다. 왁자지껄한 웃고 떠드는 아이들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주인, 세계와 하나가 된다.

'세계의 주인 각본집' 中 마지막 장면을 서술한 부분.

초고와 완성본을 놓고 봤을 때, 가장 흥미롭게 비교해 볼 만한 대목으로 윤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꼽았다. 친구들에게 성폭행 경험을 털어놓은 뒤 흔들렸던 주인의 일상이 주변의 격려와 응원 속에서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다.

윤 감독은 "원래 마지막 장면은 풀 숏(full shot)으로 찍을 계획이었다. 주인이 아이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마음껏 어울리는 순간을 넓게 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김지현 촬영감독이 "주인과 세계가 하나 되는 순간을 카메라가 꼭 바라봐야 할까?"라고 질문하면서 마지막 장면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바뀌게 됐다.

윤 감독은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은 화면 바깥의 소리로만 존재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그게 더 좋은 선택이었다. 이런 과정이 영화를 만드는 가장 재밌는 순간"이라고 전했다. 카메라가 뛰어가는 주인이를 뒤쫓지 않고, 가만히 그 빈자리를 응시할 때 생겨나는 여백의 감각으로 인해 영화 세계가 한층 더 넓어진 셈이다.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바른손이앤에이)

영화는 무지하고 잘못된 배려가 또 다른 폭력이 되는 순간을 비추기도 한다. 피해자를 위로한다고 했던 행동들이 2차 가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윤 감독은 "내게 늘 어려운 지점은 선과 악이 싸우는 게 아니라 선과 선이 싸울 때"라고 말했다.

그는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오히려 혼란을 가져온다. 그 혼란 속에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라며 "누구나 이런 혼란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내가 영화에서 택한 방식은 '보자'는 거였다. 그 상황을 제대로 봤을 때, '우리는 이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라는 질문이 시작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윤 감독은 "영화에서 주인이가 친한 친구 유라에게 '나 좀 봐봐'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유라도 '그래, 봤다'라고 장난스럽게 답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봤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현실에서는 보지도 않은 채 판단이 먼저 발동되는 일이 너무 흔하니까 실제로 그 사람을 보고, 듣고, 느끼자는 거다. 지금 그 사람 자체나 주변의 문제를 정말로 꺼내서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전했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우리들'을 거쳐 '세계의 주인'을 만들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간 10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려온 윤 감독은 "예전에는 인물이 어디로 가야 한다거나 뭔가 꼭 돼야 한다는 식으로 방향을 제시했다. 이제는 내가 제시한 방향이 옳은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만든 인물이 어디로든지 갈 수 있고, 아무 곳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삶에는 너무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예전에는 조금 더 희망적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살면서 고통이 뒤따르는 건 당연하고, 슬픈 일들이 반복적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다만 그런 고통이나 슬픔을 안고도 살아가는 데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라고 전했다.

차기작에 관해 윤 감독은 "이제 써야 한다"라며 밝게 웃었다. 그는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그걸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말하기에는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 정말 알 수 없어서 조심스럽다. 지금 말하면 오히려 거짓말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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