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제16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으로 등장한 장강명 작가의 장편소설 '표백'은 출간 당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젊은 층이 겪는 허무감과 좌절을, 기획된 '연쇄 자살'이라는 충격적이고 기괴한 소재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청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성세대가 이미 구축해 놓은 '완성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작은 '입신' 외에는 이룰 것이 없다는 냉소적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사회적 성공의 가치를 '표백(漂白)'시키고자 한다. 성공의 정점에 도달했거나 그 직전에 서 있던 이들이 자살함으로써, "당신들이 말하는 성공은 사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메시지를 역설하는 것이다.
소설은 한 재벌 3세의 부고 기사로 문을 열고, 서울의 명문대에 재학 중인 '나'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나'는 술자리에서 신비하고 매혹적인 세연을 만나고, 휘영·병권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다.
세연은 이들에게 7급 공무원 준비 등 '작지만 안전한 성공 경로'를 권하는 듯 보이지만, 갑작스럽게 자살을 선택하며 '잡기 모음'이라는 암호화 파일을 남긴다. 이후 시간이 흘러 7급 공무원이 된 '나'는 과거 연인이었던 '추'의 자살을 계기로 모든 죽음이 세연의 계획 아래 진행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재벌 3세, 연인 추, 공인회계사 합격생 병권까지—겉으로 보기엔 성공했다며 축하받을 만한 삶의 국면에서 이들은 차례로 죽음을 택했다. 이들의 선택은 '와이두유리브닷컴'이라는 사이트와 세연이 남긴 '잡기 모음'을 통해 사회적으로 폭발하며 파문을 일으킨다.
'나'와 휘영은 세연의 암호 파일을 해독하기 위해 분투하고, 결국 세연이 죽은 뒤에도 유령처럼 배후에서 모든 일을 설계한 '흑막'의 정체와 맞닥뜨린다. 작품은 이 '표백' 프로젝트가 향하는 궁극적 목적과, 허무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표백'은 출간 당시부터 청년층의 경제적 좌절을 가장 극단적으로 포착한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설이 던지는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메시지는 단순한 개인의 허무를 넘어선 구조적인 절망감을 반영했다.
소설에서 '완성된 세계'는 기득권이 이미 부와 기회를 독점해 놓은 사회 구조를 상징한다. 평범한 청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존 질서를 뒤흔들 수도, 계층 사다리를 오를 수도 없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이는 이후 한국 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헬조선' 담론, 'N포 세대'의 출현을 예고했다.
7급 공무원, 공인 회계사 합격생, 재벌 3세 등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은 '성공의 관성'을 따랐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자살은 높은 스펙과 사회적 지위가 개인의 내면적 행복이나 성취감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청년들이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스펙 경쟁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현실 또한 날카롭게 비판한다.
소설은 경쟁과 효율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허무를 드러낸다. 외형적 성취는 늘어가도 삶의 의미는 점점 공허해지는 모순을 '표백'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표백'이 독자에게 남기는 핵심 질문은 "왜 사는가(Why do you live)?"이다. 소설 속 청년들은 이미 짜인 성공의 서사를 거부하고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재정의하려 한다.
이미 다 짜인 세상의 규칙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의심하고, 주어진 삶의 틀을 벗어나 ‘나만의 서사’를 새로 써 나가야 한다는 촉구가 작품 곳곳에 숨어 있다.
'표백'은 오늘의 청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남이 정해주는 의미가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실이 팍팍하고 불완전할수록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더욱 중요해진다. '표백'은 그 위험하고 불편한 질문을 가장 선명하게 꺼내 놓은 작품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