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실질가치 16년 만 최저…원·달러 환율 1500원 시대 현실화되나

10월 실질실효환율 89.09로 금융위기 이후 최저
서학개미 해외투자·대미투자 합의로 달러 수요 급증
외국인 코스피 14조 순매도…엔·위안화 동반 약세
전문가들 "내년 평균 1420원, 최고 1540원 전망”

▲21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피 지수가 나오고 있다. 사진=고이란 기자 photoeran@

원화의 실질 구매력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6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원·달러 환율 1500원 시대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3일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10월 말 기준 89.09(2020년=100)를 기록했다. 이는 전월 대비 1.44포인트 하락한 수치로, 2009년 8월 말 88.88 이후 16년 2개월 만에 최저치다.

실질실효환율은 명목환율에 물가 수준까지 고려해 주요 교역상대국 통화 대비 자국 통화의 실질 가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지표다. 100보다 낮으면 기준 시점 대비 저평가 상태를 의미한다.

BIS 통계에 포함된 64개국 중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일본(70.41), 중국(87.94)에 이어 세 번째로 낮았다. 10월 한 달간 하락 폭은 뉴질랜드(-1.54포인트)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11월 들어서도 원화 약세는 더욱 심화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월 1일부터 11월 11일까지 원화 가치는 4.1% 하락해 엔화(4.0% 하락)보다도 하락률이 컸다. 13일 원·달러 환율은 장중 1481원까지 치솟았고, 21일에는 1475.6원에 마감하며 1500원 돌파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원화 약세의 배경에는 구조적 달러 수요 증가가 자리잡고 있다. 개인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투자가 급증하면서 환율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11월 들어 14일까지 '서학개미'들은 미국 주식을 36억3376만 달러 순매수했으며, 올해 누적 순매수 규모는 269억5739만 달러에 달한다

이정훈 유진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4년간 해외투자가 100억 달러 증가할 때 달러-원은 14원 상승했다"며 "2022년 말 이후 내국인의 해외증권투자 규모가 무역수지 규모를 넘어서면서 이제 무역으로 버는 돈보다 해외투자 수요가 구조적으로 많아진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미 양국의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양해각서(MOU) 체결도 달러 수요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수출 대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즉시 환전하지 않고 보유하는 '래깅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실제 기업들이 보유한 외화 예금은 918억 달러로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규모 국내 주식 매도도 원화 약세를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1월 들어 21일까지 외국인은 코스피 시장에서 12조 원 이상을 순매도했다. 21일에는 단 하루에 2조8308억 원을 순매도하며 역대 최대 일일 순매도 기록을 경신했다.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의 동반 약세도 원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5년 하반기부터 원화-엔화 상관계수가 0.94로 높아지며 두 통화가 거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김찬희 신한투자증권 채권전략가는 "10월 소비자물가 상승은 환율 상승과 더불어 긴 추석연휴 및 APEC 기간의 여행 수요가 집중돼 개인서비스 물가가 오른 마찰적 영향이 컸다"며 "원·달러 환율 역시 1400원대 중후반은 엔화 약세 연동 및 외국인의 원화 자산 일괄 매도로 오버슈팅된 구간"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로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NH선물은 2026년 원·달러 환율 전망치 상단을 1540원으로 제시했으며, NH투자증권은 내년 평균 환율을 1420원으로 전망했다.

이정훈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한국은 연기금들의 해외투자 확대라는 중장기 포트폴리오 조정과 함께 개인 투자자들의 미국 투자 광풍이 겹친 상황"이라며 "달러-원 환율이 안정되려면 나스닥 불패 신화에 대한 개인들의 믿음이 깨지거나 연기금들의 포트폴리오 조정이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해당 시점은 2027년 이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은행은 27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환율 부담과 부동산 시장 불안을 고려해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최근 "완화적 통화 사이클 유지가 공식 입장이지만, 금리 인하의 규모와 시기는 새로운 데이터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발언했다.

다만 경상수지가 29개월째 흑자를 유지하고 있어 외환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다. 김 채권전략가는 "물가는 연말을 지나며 2% 목표 범위 내외로 안정될 전망"이라며 "아직 추세적인 물가 상승에 따른 긴축적 통화정책 대응을 경계해야 할 시점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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