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지원보다 산업 생태계 중심 접근 필요”
퇴출 고위험 기업 절반만 실제 시장서 정리… GDP 0.5% 손실 추정
한은 "진입·퇴출 활성화·신산업 투자 확대가 성장 회복의 핵심"

우리 경제의 구조적 성장 둔화가 단순한 경기순환이 아닌, 경제 위기 후 기업투자 부진과 정화효과 약화에 따른 장기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은행은 수익성이 낮은 한계기업의 퇴출이 지연되고 신생기업의 진입이 원활하지 않아 성장 잠재력이 제약되고 있다며 구조 개혁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국은행은 12일 공개한 'BOK 이슈노트'를 통해 1990년대 이후 외환위기, 금융위기, 팬데믹 등 경제위기를 거칠 때마다 성장률이 한 단계씩 낮아지는 구조적 둔화가 지속됐다며, 이는 수요 위축이 기업투자 경로를 통해 성장 추세를 훼손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거시 분석 결과, 외환위기 이전에는 공급요인이 성장의 주된 동인이었으나 이후에는 수요요인이 GDP 변동의 핵심 요인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2010년대 이후 구조적 수요충격이 성장에 미치는 기여도는 마이너스로 전환돼, 성장세를 오히려 끌어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경제 위기 이후 구조적 수요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투자와 GDP는 이전 추세를 충분히 회복했을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위기 충격이 투자 위축과 수요 둔화의 악순환을 만들며 장기 성장경로를 낮추는 이력현상이 작동했다고 분석했다.
기업 단위 분석에서는 대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기업의 투자가 2010년대 이후 정체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표본의 절반가량에서 투자 증가율이 음(-)의 값을 보였고, 특히 영업이익이 감소한 기업은 투자뿐 아니라 연구개발·고용에서도 부진이 심화됐다.
이종웅 한국은행 조사국 조사총괄팀 차장은 "기업의 투자 부진은 금융제약보다 수익성 저하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며, "영업이익률이 1%포인트 높아질 때 투자율이 0.07~0.09%포인트 증가하는 관계가 관찰됐다"고 설명했다.
반면 부채비율이나 유동성 비율은 투자 변화와 유의한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위기 이후 기업들이 수익성 악화로 미래 수익에 대한 기대가 줄면서 투자에 소극적으로 변한 데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한은은 부정적 수요충격이 기업 수익성을 장기간 낮추고, 이로 인해 혁신투자와 생산성이 함께 둔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며 기업의 본질적인 영업활동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 중장기 성장 회복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계기업의 퇴출 지연이 정화효과(cleansing effect)를 약화시키며 성장세 둔화를 가속화했다고 분석됐다. 2014~2019년 사이 실제 퇴출된 기업 비중은 2%에 불과했으나, 재무상태상 퇴출 위험이 높은 '퇴출 고위험기업' 비중은 4%로 추정됐다.
부유신 한국은행 조사국 조사총괄팀 과장은 "우리나라는 위기 때마다 성장세가 둔화됐지만, 미국 등 주요국처럼 위기 국면에서 비효율적 기업이 정리되는 정화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며, "한계기업이 시장에 잔존하면서 기업 역동성이 떨어지고 투자 부진이 구조화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퇴출 고위험기업이 정상 기업으로 대체되었다면 같은 기간 국내 투자는 3.3%, GDP는 0.5%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팬데믹 이후에도 고위험기업 비중은 3.8%로 비슷했지만, 실제 퇴출은 0.4%에 그쳐 정화 메커니즘이 더욱 약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퇴출 고위험기업의 수익성과 재무건전성은 낮지만 유동성은 양호해, 만기 연장 등 금융지원으로 시장 잔존이 가능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저생산성 기업이 구조조정 없이 연명하며 시장의 자원배분을 왜곡하는 '좀비기업'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은행은 정책 대응 방향으로 기업 진입·퇴출의 원활화, 선별적 금융지원, 신산업 투자 활성화를 제시했다. 한계기업을 인위적으로 지원하기보다 혁신적 초기기업에 자원을 배분해 산업생태계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이와함께 반도체·자동차 등 기존 주력산업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는 동시에, 규제 완화를 통해 신산업 투자 기반을 넓히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은은 "성장 둔화를 완화하려면 한계기업의 퇴출과 신생기업의 진입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한다"며, "금융지원이 개별 기업이 아닌 산업 전체의 혁신성과 역동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