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창기 엔비디아는 컴퓨터게임용 그래픽처리장치(GPU) 만들던 작은 기업이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인공지능(AI) 산업의 최전방에서 세계 자본시장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우뚝 섰다. ‘AI 반도체’라는 신산업을 개척한 이 회사의 여정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산업 구조의 전환이었고, 이는 우리나라 산업에도 꼭 필요한 요소로 꼽힌다.
◇기술보다 설계…AI 시대의 경쟁력은 아키텍처 = 엔비디아는 제조 시설이 없는 팹리스 기업이다. 엔비디아의 핵심 경쟁력은 반도체를 잘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칩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있는 셈이다.
GPU의 본질은 공정 기술이 아니라 ‘병렬 연산 아키텍처’ 설계력이다. 국내 반도체 산업은 여전히 공정·패키징 중심의 제조 역량에 강점을 보이지만, 엔비디아는 지식재산(IP)·아키텍처 설계 중심 구조를 구축했다.
AI 시대의 반도체 경쟁은 미세공정 경쟁을 넘어 연산 구조를 설계하고, 이를 소프트웨어·플랫폼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아키텍처 설계 능력은 지금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연구를 거듭하며 후발주자와의 격차를 벌리고 있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대규모 모델 훈련과 추론을 지원하는 차세대 아키텍처를 지속 개발 중”이라며 “AI 워크로드 최적화에 초점을 맞춘 GPU·중앙처리장치(CPU) 통합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제품군 확대 등 산업 생태계를 아우르는 통합 플랫폼을 구축해 AI 인프라 시장의 주도권 강화를 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엔비디아의 진정한 해자는 CUDA와 네트워크 = 엔비디아는 GPU 하드웨어가 아닌 개발 언어(CUDA)를 통해 시장을 장악했다. CUDA는 GPU의 병렬 연산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래밍 언어다. 꾸준히 시장을 확대하며 AI 모델을 학습하고 운영하는 개발자에게 사실상 표준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AI 산업의 대부분 프레임워크와 툴이 CUDA 환경을 기반으로 돌아가면서 개발자들은 엔비디아 생태계에 깊이 종속됐다. 현재 전 세계 600만 명이 넘는 개발자가 CUDA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곧 엔비디아가 구축한 소프트웨어 락인(Lock-in) 구조의 규모를 보여준다.
이 같은 생태계 독점은 단순한 기술력이 아니라 개발자와 기업이 탈출할 수 없는 구조적 장벽을 만든다는 점에서 강력하다. AI 시대의 경쟁은 하드웨어의 성능 싸움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개발자와 데이터를 자사 플랫폼 안에 묶어두느냐의 문제로 이동했다.
차용호 LS증권 연구원은 “지난 3~4분기 동안 출하된 블랙웰의 반도체가 600만 개라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요가 지속하는 수준이 아닌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며 “이러한 폭발적인 수요가 가능한 이유를 엔비디아는 CUDA를 통해 선순환 구조를 형성했으며 네트워크를 포함한 전 단계에 걸쳐 접근하는 플랫폼 기업이라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5조 달러는 정점인가, 새로운 기준인가 = 엔비디아의 시가총액 5조 달러는 기술기업 역사상 전례 없는 기록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새로운 산업 기준점’이라는 평가와 ‘AI 버블의 정점’이라는 경고가 엇갈린다. AI 인프라 투자가 둔화될 경우 단기 조정 압력이 불가피하다는 관측과 동시에 AI 경제의 본격적인 성장 초입이라는 시각도 공존한다.
국내외 자본시장 전문가들은 향후 AI의 폭발적 성장과 엔비디아의 상승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박제민 SK증권 연구원은 “지난달 열린 GTC 워싱턴 행사에서 엔비디아는 전방 수요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며 “2026년까지 블랙웰(Blackwell)과 루빈(Rubin) GPU 예약 규모가 5000억 달러(약 680조 원)에 달한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데이터센터 부문 매출 컨센서스(3630억 달러)보다 약 38% 높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매트 브리츠먼 영국 자산운용사 하그리브스 랜즈다운 수석 주식 애널리스트는 “시가총액이 5조 달러에 이르렀다고 해도 이 종목은 여전히 지나치게 비싼 주식이 아니다”라며 “시장에서는 여전히 기회의 규모를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엔비디아는 AI 산업에 투자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 중 하나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