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을 계기로 타결된 한·미 관세협상의 후속 절차에 관심이 쏠린다. 협상의 형식은 양해각서(MOU)지만, 그 안에 입법·재정 부담이 담긴다면 헌법상 국회 비준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3일 국회와 정부 부처 등에 따르면 이번 합의의 큰 틀은 미국의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한국은 3500억 달러 투자 패키지 중 2000억 달러를 현금으로 연 200억 달러 상한으로 집행하는 구조다. 조선·해양플랜트(MASGA) 협력도 포함됐다.
정부와 국회가 이번 협상 결과를 실행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비준 동의 후 이행입법 병행’ 방식이 가능하다. 협정문이 입법사항이나 재정부담을 포함하면 국회 비준으로 조약의 효력을 확정하고, 이후 관세·원산지·검증 절차를 규정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구조다. 헌법 제60조 1항에 따르면 ‘국가가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은 국회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 비준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재적 의원 과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 찬성이 필요하다. 2011년 한·미 FTA 비준이 바로 이런 사례다. 이 경우 절차는 길지만, 법적 안정성이 높다.
둘째는 ‘특별법 단독 처리’다. 이번 협상을 조약이 아닌 행정합의로 보고, 국회 비준 없이 ‘대미투자특별법(가칭)’ 등 국내 이행법만으로 내용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다만 조약 성격이 인정될 경우 비준 생략은 위헌 논란에 직면할 수 있다. 셋째는 ‘탄력관세 병행’이다. 협정 비준이 늦어질 경우 관세법 제69~71조에 따라 할당·조정·긴급관세를 활용해 일시적으로 세율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는 국제의무를 창출하는 조약을 대체할 수 없고, 한시적 ‘운용조치’에 불과해 채택 가능성이 작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협정의 핵심 쟁점이 재정 부담과 입법 사항, 국민 권리 제한 여부에 달려 있다고 봤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MOU는 통상 양해·협조를 의미하지만, 그 내용이 국민의 기본권이나 국가 재정에 영향을 미치면 입법사항으로 봐야 한다”며 “그럴 경우 국회의 비준 동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장 명예교수는 “만약 미국과 합의 해서 일정 액수를 투자하기로 약속했다면, 그 약속의 이행을 위한 법을 만들기 전 비준 동의가 먼저 이뤄지는 게 맞다”고 했다.
외교통상·국제법 전문가인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이번 합의는 대규모 투자, 관세율 조정 등으로 국제법상 권리·의무를 창출하는 조약”이라고 해석했다. 최 교수는 “이는 헌법상 국민의 재정 부담과 입법사항, 주권 제약을 수반하므로 비준 동의 대상”이라며 “정치적 합의로만 처리한다면 헌법 위반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비준 절차는 정부가 조약안을 국회에 제출→국회 외교통일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 심사 →본회의 비준 동의 의결→대통령 비준 서명→양국 간 비준서 교환→공포·발효의 순서로 진행된다. 2011년 한·미 FTA의 경우 11월 22일 국회 비준 통과, 2012년 2월 대통령 비준과 비준서 교환, 3월 15일 발효라는 절차를 밟았다. 비준서 교환은 양국이 조약을 국내적으로 승인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하고 교환하는 행위로, 이 시점부터 국제법상 효력이 발생한다.

또 다른 쟁점은 반도체 관세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달 31일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번 MOU에는 담기지 않지만 조인트 팩트시트(Joint Fact Sheet)에는 대만에 비해 불리하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밝혔다. 대만의 관세 협상이 마무리되면 그 결과를 반영해 한국의 반도체 품목에 적용될 관세율이 조정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조인트 팩트시트는 양국이 협의한 사실관계를 정리한 설명자료로, 법적 구속력은 없다.
반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엑스(X·옛 트위터)에서 “반도체는 이번 합의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밝혀 한미 간 인식차를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한·미 간 정식 합의가 우선돼야 하며, 김 실장의 설명처럼 반도체 조항이 팩트시트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국회 비준 절차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장 명예교수는 “반도체 수출입 절차와 같은 기술적인 부분은 국회 비준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되지만, 관세와 직접 연결돼서 특별한 제한이 부과된다면 이건 기업들의 재산권과 직결된 문제로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도 “형식이 MOU이든 팩트시트이든 중요하지 않다”며 “합의의 성격이 국제법적인 의무에 해당하느냐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른 정치권 공방도 뜨겁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와 함께 대미 투자 관련 특별법을 준비하고 신속히 처리하겠다”며 속도전을 택했지만, 야권은 “입법사항이면 비준이 원칙”이라고 맞섰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APEC에서 정부가 이룬 합의를 구체적 결과로 실현해내야 한다”며 “민주당은 정부와 함께 대미 투자 관련 특별법을 준비하고 신속히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당 차원에서 ‘APEC 및 관세협상 성과 후속 지원을 위한 특별위원회(가칭)’를 출범해 입법 활동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입법 지원활동의 구체적인 절차에 대해 “지금 단계에서 비준이냐, 특별법이냐를 논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정부가 국회 협력을 요청하면 그때 어떤 방식으로 협력할지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합의문이나 공동성명조차 없는 백지 외교”라며 국회 비준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동혁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재명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이 한미 관세 협상에 대해 국회 비준이 아니라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협상 내용을 꼭꼭 숨기겠다는 것”이라며 “특별법 제정이 아니라 합의문 발표가 먼저”라고 했다. 송언석 원내대표도 “한미 관세 협정은 헌법 제60조에 따라 국회의 비준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이를 법률 제정으로 처리하려 한다면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한 명백한 위헌 행위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을 야당인 국민의힘 김석기 의원이 맡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절차상으로는 외통위 위원장 권한으로 상정을 미루거나 최악의 경우 상정을 거부하는 것도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