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안전 불감증…산업현장 안전, 제도 넘어 ‘문화’ 문제로 [위기의 산업현장 ④]

건설·조선·제조 현장 ‘공기 압박’에 안전 뒷전으로
日 작업주임자·英 CDM 제도 등 사전 예방 체계 주목

최근 정부가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관련 법, 제도를 정비하겠다고 나섰지만, 전문가들은 한국의 산업안전 관련 법이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산재 발생 시 사업주·경영책임자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지난 2022년 시행됐지만, 산재 사망사고는 꾸준히 이어졌다. 업계에서는 ‘빨리빨리’ 문화가 만드는 위험한 관행과 현장 관리자·근로자의 과거에 머물러 있는 안전인식부터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9일 본지 취재 결과 최근 발생하는 산업현장 사고 중 상당 수는 안전용구 미착용 등 여전한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사고로 나타났다.

산업현장에서 ‘빨리빨리’ 문화는 고질병으로 꼽힌다. 공기를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하려는 압박 속에 안전보다 속도를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건설현장에서는 마감 시한에 쫓겨 작업 절차를 생략하거나,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충분한 안전조치 없이 공사가 강행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지난 8일 발생한 DL건설 현장에서 발생한 근로자 추락사고의 경우 숨진 하청업체 소속 근로자 A 씨는 안전모는 착용하고 있었으나, 추락 방지용 안전고리를 채우지 않은 채 작업을 하다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사고는 반복되고 있다. 2023년 7월 동양건설산업이 시공한 청주 오송역 파라곤 2차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발생한 베트남 노동자 2명의 추락사고도 기본적인 안전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당시 관계기관 조사 결과 갱폼 해체 전 타워크레인에 인양고리를 안전하게 매달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기존층과 결속돼 있던 철제물들을 해체해버린 것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공기를 맞추기 위해 종종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노동자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 화성시 리튬 1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폭발 참사 또한 과도한 생산 압박과 미흡한 안전관리가 사고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당시 현장 관계자들은 군납용 리튬전지의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공정을 가동했으며, 폭발·발열 전지 발견에도 외려 생산량을 늘렸다고 밝혔다.

지난달 검찰은 아리셀의 박순관 대표에게 징역 20년을 구형하면서 "박순관은 아리셀 경영책임자임에도 아리셀의 안전관리 구축을 포기하고 방치했다"고 꼬집었다.

최근 다시금 호황기에 접어든 조선업은 안전사고도 함께 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선박건조 및 수리업 산재 피해자 수는 2020년 1151명에서 2023년 1652명으로 4년간 43.5%(501명)가 늘었다. 업계에서는 국내 조선소가 호황을 맞아 3년치 이상의 일감이 꽉 찼으나, 안전을 지키면서 납기도 맞추는 건 쉽지 않다는 토로가 적잖이 나온다.

근로자 개인의 미흡한 안전 의식이 초래한 사고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일 전북 완주군 도로시설 개량 공사 현장에서는 근로자 B 씨가 절연장갑, 절연장화 등 개인 안전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작업하다가 감전돼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달 21일 경기 파주시의 한 아파트 기계실에서는 전기실 누수와 관련한 방수작업을 진행하던 근로자 C 씨가 안전모, 안전화를 착용하지 않아 추락,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근로자 개인의 ‘안전불감증’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국토안전관리원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국 건설현장 약 1만6002곳 점검 결과 안전 관리 부적정으로 인한 지도 및 계도 건수가 총 3만1896건에 달했다. 이는 현장당 약 2건 이상의 부적정 사례가 있었다는 의미다.

결국 안전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는 문화와 제도가 정착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보다 산재 사망사고율이 낮은 해외에서는 안전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산재 사망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대표적인 업종인 건설업의 경우 2023년 기준 한국의 사망만인율은 1.59퍼밀리아드를 기록했으나, 일본(0.68), 독일(0.29), 영국(0.24)은 이보다 현저히 낮다.

일본의 특징적인 제도 중 하나는 작업주임자 제도다. 위험 작업을 수행하는 모든 하도급사는 각각의 작업주임자를 배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거푸집 조립공사와 비계 조립공사를 수행하는 2개의 3차 하도급사가 있다면, 각기 거푸집조립 작업주임자와 비계조립 작업주임자를 배치하는 식이다.

독일은 '건설현장보건안전시행령'과 '건설현장안전규칙'을 통해 구체적인 안전계획 이행방안을 실무적·기술적으로 규정했다. 안전보건조정자 제도가 핵심인데, 이들은 건축주에게 건축과정이나 작업 방식뿐만 아니라 건축물의 후속 사용 및 유지 관리에 있어서 안전 및 보건과 관련한 문제를 조언한다.

영국은 1994년부터 CDM(Construction Design and Management) 제도를 통해 발주자를 건설사업 안전보건관리의 핵심 주체로 포함시켰다. 이 제도는 시공 이전 단계부터 발주자와 설계자를 안전관리 주체로 참여시켜 시공자와 함께 협업을 유도한다. 해당 제도의 핵심은 사업 전 단계에 걸친 책임 분담이다. 발주자는 경쟁력 있는 계약자 선정 및 계약자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시간 및 비용 등)을 제공할 의무를 갖는다. 영국에서는 30일 이상 지속되거나 500인 이상 투입되는 공사에 대해서는 의무적으로 안전보건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결국 안전관리 책임을 발주·설계 단계까지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최수영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안전보건관리 체계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서는 영국과 같이 예방을 위한 제도를 시공단계에 집중하지 않고, 계획 및 설계단계부터 책임자를 선정하고 그들에게 명확한 의무를 부여하고 책임을 분담하도록 해야 한다”며 “주요 참여 주체들의 의무와 책임 분담을 통한 협력적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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