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산단 협력 中企 '시계 제로'..."물량 급감에 저가 수주·구조조정" [석유화학 위기 확산]

▲여천NCC 3공장 정문. (연합뉴스)

#"과거 대기업이 발주하는 6000만 원짜리 설비 일감에 통상 3-4개의 업체가 경쟁해 5500만 원 전후 금액으로 낙찰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발주 급감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4000만 원 수준까지 입찰가를 내려 견적을 제출하는데도, 이보다 더 낮은 3000만 원의 저가 낙찰이 이뤄지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적자가 불가피한 전략이다. 중소기업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뜻이다." (여수산단 A 중소기업 대표)

#"여수산단 대기업에 제조설비 납품 등으로 지난해 80억 원대 매출을 기록했지만, 올해 상반기까지 관련 매출이 절반에 가까운 40% 급감했다. 상반기 설비 수주량이 통상 40건 안팎이었지만 올해 같은 기간엔 그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여수산단 B 중소기업 대표)

여수국가산업단지 석유화학 대기업들의 밴더(협력)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연쇄 도산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여천NCC가 공동대주주(한화그룹·DL그룹)의 자금 수혈로 부도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지만, 중국발 공급 과잉 문제로 국내 굴지 석유화학 대기업들이 공장 가동과 설비 발주를 잇달아 줄이면서 2·3차 협력사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존폐의 기로에 놓인 협력 중소기업들은 적자가 불가피한 저가 출혈 경쟁과 인력 감축으로 버티고 있지만 언제든 쓰러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17일 여수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여수산단의 평균 가동률은 81.5%를 기록했다. 가동률이 90%를 웃돌았던 3년 전(2022년 1분기 91.1%)과 비교해 10%포인트(p) 하락한 수치다. 여수산단 가동률은 2023년 1분기 88.1%, 2024년 1분기 86.9%를 기록하며 지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의 일부 생산라인이 최근 가동을 중단했고, 이달에는 여천NCC의 자금난 사태가 불거지면서 석유화학업계 전반의 위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기업들의 이 같은 장기 침체에 중소 협력사들는 연쇄 위기에 빠졌다. 대기업들이 예산을 줄이고, 공장 가동률을 낮추면서 2, 3차 협력사에 대한 설비 시설 발주가 급감해서다. B 중소기업 대표는 "과거 대기업 설비 공사 발주가 연간 500건이 나왔다면 지금은 200건으로 절반도 안 된다"고 짚었다.

일감이 급감하면서 중소기업들이 저가 수주 경쟁은 치열해졌다. 예컨대, 4억 원짜리 설비 제조 사업 발주는 최근 2억7000만 원 수준까지 낮아졌다. 직원을 가만히 놀리면 적자가 1억 원이지만 이런 수주라도 받아야 1000만~2000만 원 가량 적자폭을 줄일 수 있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2차 업체들이 적자에 허덕이면서 3차 하청업체들은 비용 지급을 제때 받지 못하는 사례도 수두룩하다. 일감을 수주해도 적자가 불가피하다보니 하청과 재하청 구조는 이제 옛말이 됐다. 소규모 3차 협력 업체들이 쓰러지는 건 사실상 시간 문제인 셈이다.

(한국신용평가, 신한투자증권)

인력 감축도 이어지고 있다. 여수산단 협력 중소기업들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건 올해 3~4월부터다. B 대표는 "한 기업은 전 직원이 60명인데 이중 40명을 구조조정했다. 생사기로에 놓이면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중소기업에선 100여 명의 직원 중 약 30%를 퇴직 처리한 뒤 지속해서 구조조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미 다수 업체가 20~30%의 감원 또는 한시적 무급휴가(대기발령)의 형태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지 중소기업들 사이에선 올해를 넘기면서 연매출 1000억 원 대 중소기업들의 부도 가능성이 흘러나올 만큼 위기감이 상당하다. 여천NCC의 유동성 위기 재발 등 부도 가능성이 또다시 확산할 경우 석화업계 전체가 악화일로를 걸을 수 있다는 불안감도 적지 않다. 정부가 조만간 발표하는 석유화학산업 구조 개편안에서 일부 시설을 정리할 가능성이 제기되는데, 대기업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2, 3차 하청 중소기업들의 연쇄 도산 가능성도 예상된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특히 이 경우 지역경제까지 무너질 수 있다고 관측했다. C 기업 관계자는 "여수산단 인근 상권과 원룸은 이미 싹 다 죽었다. '임대'가 셀 수 없이 붙었다"라며 "사람 없는 곳에선 풀도 안 난다"고 전했다.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풍전등화 위기에 놓인 업계는 '울산 샤힌 프로젝트'를 또다른 위협 요인으로 보고 있다. 샤힌 프로젝트는 에쓰오일(S-Oil)이 울산 온산국가산업단지에서 진행 중인 석유화학생산시설 조성 사업으로 2027년 가동을 시작한다. 에틸렌, 폴리에틸렌 등을 생산할 예정이다. B 관계자는 "더 큰 석화제품 출혈경쟁으로 여수산단은 그야말로 폭풍 속 사투를 벌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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