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의 경영학] ‘도전정신’ 현대家… ‘인화경영’ LG家

입력 2015-02-0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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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끊임없는 도전 한국자동차 성장 견인… LG, 엄격한 가정교육 통해 신뢰 의리 강조

현대차와 LG는 현재 국내 재계 2, 4위 그룹이다. 하지만 그 시작은 미약했다. 현대차는 싸구려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고 LG는 작은 동네 포목점이 시초였다.

그럼에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고(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등 1세대는 오로지 ‘사업보국’의 일념으로 기업을 일으켰고 이들의 경영철학은 ‘보릿고개’를 겪던 한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85년 포니 엑셀 신차 발표회장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제공=현대차그룹)

◇현대가, 빈손·도전으로 일군 재계 2위 =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國旗)’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내 후배들에게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놓을 것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의 창업정신이 주목받고 있다. 1000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 ‘국제시장’에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정주영 명예회장이 우리 기억에 남긴 발자취는 선명하기 때문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자동차 회사 설립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1975년 5월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는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자동차의 독자 기술 개발을 포기하라는 권유도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당시 “독자 모델을 포기하면 모든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다”며 “현대가 미국 회사를 선택하기만 하면 유리한 조건으로 조립생산을 지원하겠다”고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말했다.

독자기술 개발 대신 미국 자동차 회사의 조립공장이 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외국 자동차 조립생산은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 속 빈 강정”이라고 평가했다. 장래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생각은 우리나라가 자동차 산업 성장의 분기점이 됐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사업의 미래를 위해서는 주변의 조언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재계에는 익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정주영 명예회장은 고(故) 이상순 일산실업 명예회장(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장인)과 가까이 지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상순 명예회장과 전국의 이곳저곳을 함께 돌아다니며 사업 구상과 터에 대해 함께 논의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상순 명예회장과 정주영 명예회장은 아홉 살의 나이 차이에도 형 동생처럼 친하게 지냈다”며 “한국 산업의 창업정신을 일군 1세대”라고 말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도전정신과 창업정신은 지금의 범현대가가 물려받았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현대차가 ‘싸구려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로 발돋움시켰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글로벌 생산량 5위를 기록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구인회 LG 창업 회장(왼쪽 두번째)이 1961년 국내 첫 국산화 자동전화기로 시험통화하고 있다.(사진제공=LG그룹)

◇LG가, 인화 밑바탕 사회적 가치 창출=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 동양의 고전 ‘맹자’에 나오는 말로 “천시가 지리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만 못하다”로 풀이된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인 LG그룹에 있어 이 세 가지 관점이 경영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인화는 LG그룹 창업주 연암(蓮庵) 구인회 회장이 시작했으며 손자인 구본무 현 LG그룹 회장에 이르러 ‘정도경영’으로 결실을 맺었다.

LG가의 핵심 가풍이라 할 수 있는 ‘인화’는 GS그룹의 허씨 가문과 57년간의 성공적 동업 관계를 유지한 후 아무런 잡음 없이 ‘아름다운 이별’을 할 때도 빛을 발했다.

두 그룹이 분리를 앞둔 2001년 어느 날 LG그룹의 구자경 명예회장과 허준구 명예회장이 마주 앉았다. 허 명예회장은 아들 허창수 회장이 애지중지하며 키워낸 “LG전선과 산전을 우리가 맡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 명예회장은 “그건 곤란하다”고 난색을 보였다. 이에 허 명예회장은 돌아와 가족회의를 열었다. 물론 가족들은 술렁였지만 허 명예회장은 구 명예회장을 믿고 포기를 선언했다.

이후 LG전선과 LG산전, E1 등은 구 명예회장의 사촌들에게 돌아갔다. 구 명예회장은 사리사욕을 채운 것이 아니라 집안의 인화를 위해 사촌들 몫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분리를 논의하던 중 이번에는 LG정유(현 GS칼텍스)가 구씨 집안에서 논란이 됐다. “가만히 있어도 돈이 되는 정유사업을 허씨 집안에 넘겨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이에 구 명예회장은 “내가 아까워하는 것을 내줘야 그쪽에서 서운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리했다고 전해진다.

반세기 동안 두 집안을 이어줬던 것은 신뢰와 의리였고, 이는 LG가의 엄격한 가정교육에서 비롯됐다.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은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며 자식들에게 늘 인화를 강조했다.

LG가의 핵심 가치를 만든 구인회 창업회장은 인(仁)과 덕(德) 그리고 근검절약을 생활화하며, LG연암문화재단 설립을 통한 교육분야 등에도 남달리 심혈을 기울여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에 본보기가 됐다.

특히 국민생활에 편의를 제공하는 제품을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효시인 플라스틱산업, 전자산업, 석유화학산업 등을 중심으로 근대적 공업화의 기업군을 형성했다. 또 국가산업 여명

기에 국민생활에 꼭 필요한 화장품과 플라스틱, 치약, 라디오, 전화기, TV, 세탁기 등을 개발했다. 이러한 LG의 발걸음은 현재의 고객 중심 경영관의 밑바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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