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어제/12월21일]파독 광부 독일행…메이플라워 도착…전차군단 패튼 사망

입력 201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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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 사

◇ 나라 안 역사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12월 파독 광부와 간호학생들에게 연설하고 있다.(사진=뉴시스)

<2001년> 서해안 고속도로 완전 개통

<2001년> 언론인 송건호 사망. 19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시 박정희 정부의 탑압으로 기자들이 대량 해고되자 사표를 냈다. 이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해 초대 의장을 맡았고, 1988년 창간된 한겨레신문의 창간을 주도해 초대 사장과 발행인도 역임했다

<1983년> 문교부, 학원사태 제적생 복교 허용

<1979년> 최규하 10대 대통령 취임

<1974년> 중앙일보와 TBC 합병

<1965년> 백범 김구 살해범 안두희, 20대 청년으로부터 피습당함

<1963년> 파독 광부 123명, 에어프랑스 전세기편으로 서독으로 출국

<1961년> 북한을 옹호하는 사설 등을 발간한 혐의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형됨

<1961년>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으로 밀려온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 등으로 최인규 전 내무장관과 곽영주 전 경무대 경호책임자, 연예계 정화대상으로 지목된‘연예계 황제’ 임화수 등에 대한 사형 집행

<1905년>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대 조선통감으로 임명

<1878년> 그리스도 전도회, 구세군으로 개칭

▲구세군 사관들이 2014년 12월 1일 대구백화점 앞 광장에서 대구경북 구세군자선냄비 시종식을 열고 있다.(사진=뉴시스)

◇ 나라 밖 역사

<2007년> 슁겐 조약 발효로 유럽 24개국, 21일부터 국경 완전 개방

<1991년> 소련 11개 공화국, 독립국가연합(CIS) 창설. 소련 공식 소멸

<198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 뉴욕으로 가던 팬암기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플라스틱 폭탄이 기내에서 폭발해 승객 258명 등 전원 사망

<1981년> 중국, 광개토대왕비를 1급 보물로 선정

<1972년> 서독과 동독, 관계정상화 기본조약 조인

<1971년> 오스트리아 전 외무장관 쿠르트 발트하임, 제4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됨. 그는 상임이사국으로 도약한 중국의 반대로 1981년 3선에 실패했다. 그러나 사무총장의 경력을 효험을 발휘했는지 나치에 적극 협력했다는 폭로에도 1986년 고국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빈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나치 독일의 점령 당시 독일군 정보장교이자 돌격대(SA) 단원이었던 국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 바람에 그는 국가 원수가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로 지목돼 해외방문조차 할 수 없는 망신을 당했다.

<1946년> 일본 시코쿠 해역에서 진도 8.0의 지진 발행해 1400여명 사망

▲조지 스미스 패튼
<1945년> 미국 장군 조지 스미스 패튼 사망.스코틀랜드 계열로 대대로 군인 집안 출신인 그는 2차 대전 당시 전차를 앞세운 저돌적인 기동전과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다. 작품상 등 7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은 1971년 작 ‘패튼 대전차 군단’도 이런 그를 그렸다. 영화에서 패튼을 연기한 조지 스콧은 “조국을 위해 죽겠다는 놈치고 전쟁에서 승리한 놈 없단 걸 기억하기 바란다. 승리하려면, 불쌍하고 멍청한 상대 놈이 그 놈 조국을 위해 죽게 만들어야 한다”고 부하들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렸다.

미국 육사인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그는 소위 임관 직후 멕시코 내전에서 사령관 존 퍼싱의 부관으로 참전, 적장인 판초 비야의 지휘소를 기습하여 장군 한 명을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개선하는 엽기적인 행각으로 일약 유명해졌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에 의해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에 발탁돼 기동전 신봉자가 된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 포스터.

제2차 세계대전에는 장군으로 참전해 북아프리카, 시실리, 프랑스, 독일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튜니지아 등에서는 제2기갑 병단을 이끌고 독일의 영웅이자 연합군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던‘사막의 여우’ 롬멤이 이끌다 막 떠난 북아프리카 군단과 격전을 벌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북프랑스에서 하루에 110km나 진격하기도 했다. 파리를 해방시키고 벌지 전투에서도 전과를 올리며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통상적인 군대 규칙을 무시한 듯한 대담한 발상과 거침없는 전진, 불같은 호전성은 큰 전과를 올렸지만 많은 무리도 따랐다. 신중한 스타일의 영국군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와 자주 마찰을 빚었고, 진공한 유럽 지역의 민간인들로부터 여러 차례 항의를 받기고 했다. 직속상관이자 웨스트 포인트 후배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패튼과 몽고메리를 중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 때문인지 독일 수도 베를린 첫 진입의 영광은 패튼과 몽고메리가 아닌 소련군에게 돌아갔다.

그는 1943년 8월 전투 노이로제에 걸려 병원으로 후송되어가던 병사를 때린 일이 널리 보도되면서 1945년 10월 제3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을 자극하는 발언도 한몫을 했다. 그의 독불장군 스타일은 골치덩어리가 된 것이다. 실의 속에 지내던 그는 1945년 12월 21일 자동차 사고로 독일 하이델베르크 병원로 이송됐으나 눈을 감았다.

<1940년> ‘위대한 개츠비’를 쓴 미국 작가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 연인의 집에서 심장마비로 44세에 사망

<193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상영

<1913년>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와 피츠버그 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던 아서 윈, 십자말 맞추기(crossword puzzle)를 고안해 재직 중이던 뉴욕 월드지에 첫 게재

<1620년> 청교도를 태우고 영국 플리머스 항을 출항한 메이 플라워 호, 네덜란드를 거쳐 현 미국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종교 등의 이유로 신대륙행을 택한 이들은 상륙전 식민지 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를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할 것을 골자로 하는 ‘메이 플라워 서약서’를 체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청교도적 사회계약은 미국의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줬다.

▲1920년 발행된 메이 플라워호 도착 300주년 기념 우표

이들 이주민은 당초 ‘올드 카머스’로 불렸으나 얼마뒤 ‘포어 파더스’로, 다시 지금과 같은 ‘필그림 파더스’로 호칭이 바뀌었다. 일부 미국인들은 자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이들 ‘원조’인양 추켜세우고 있지만 이미 남쪽 지역인 현 버지니아주에 영국 정부가 파견한 '공식' 식민지 개척민들이 제임스 타운을 건설한 상태였다.

메이 플라워 호는 무게 180톤, 길이 27.5m, 돛 3개를 가진 배로, 원래는 포도주를 운반하던 상선이었다. 9월 6일 출항한 이 배는 11월 19일에 케이프코드만을 경유, 11월 21일 오늘날의 프로빈스타운에 입항하여 선박수리와 보급을 받은 후, 12월 21일 매사추세츠 연안에 도착했다.

<1375년>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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