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는 아직도 ‘2차 대전’ 중인가[오상민의 골통(Golf通)로드]

입력 2013-03-1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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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LPGA투어 무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최나연.(사진제공=KLPGA)
“코리아낭자군, 일본정벌에 나선다.”

한 골프전문채널의 골프대회 중계방송 예고 멘트다.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는 지난주 끝난 다이킨 오키드 레이디스를 시작으로 2013시즌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올해는 어느 해보다 한국선수들의 독주가 예고되고 있다. 전미정, 이미보, 안선주 등 지난해 상금랭킹 톱랭커들이 물오른 기량을 뽐내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무대에서 활약했던 홍진주도 합류했다. 게다가 일본의 ‘에이스’ 아리무라 지에는 미국 LPGA투어로 진출, 사실상 한국선수들의 독주를 막을 수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한국선수들은 올해 JLPGA투어 최다승과 최다상금을 경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본정벌’을 자신있게 외치는 이유다. 세계 최고 기량으로 정상에 우뚝 선 우리 선수들에게 다시 한 번 격려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스포츠 경기에서 ‘정벌’이라는 표현은 결코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정벌’의 사전적 의미는 ‘적 또는 죄 있는 무리를 무력으로 침’이다. 화합과 존중을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골프뿐 아니라 대부분의 스포츠경기에서는 유난히 ‘정벌’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해외 무대 또는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거나 우승이라도 하면 여지없이 ‘정벌’이라는 말이 각종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일본열도 정벌’ ‘美 대륙 정벌’ ‘유럽대륙 정벌’ 등이 그것이다.

스포츠뿐 아니라 방송, 가요 등 대중문화에서도 맹목적 애국심과 집단주의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한류, 중국을 삼키다” “미국대륙 강타한 한류” 등 지극히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이 표현에 대해 불쾌감은커녕 유쾌하고 통쾌하게 받아들인다. 언어를 무기로 한 제국주의 야욕이 살아 있다는 증거인가. 아니면 맹목적 애국심과 민족주의 때문인가. 어찌됐든 우리 사회는 폭력적이고 전투적인 용어를 어렵지 않게 접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어폭력에 대한 도덕불감증에 사로잡혀 버렸다.

실제로 우리의 말과 글에는 제국주의 야욕이 의심스럽다. 군사적, 경제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강대국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 때문인지 아니면 숨겨진 제국주의 야욕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스포츠는 승패를 떠나 우정과 화합이 목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페어플레이가 뒷받침 돼야 한다. 승자는 패자를 위로하며 격려해야 하고, 패자는 승자를 축하하며 박수를 보내야 한다.

특히 언론은 페어플레이 본보기를 널리 알려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언론은 패자에 대한 격려는커녕 무지막지한 폭언으로 일관하며 화제성 기사를 이끌어내는 데 급급할 뿐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승리 후 “정벌했다” “집어삼켰다” “심장에 태극기를 꽂았다” 등 섬뜩한 표현으로 일관하는 것은 결코 패자에 대한 배려와 격려가 아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쉽다. 중국 축구대표팀이 대한민국 대표팀에 승리 후 “한국을 정벌했다” “대한민국 심장에 오성홍기를 꽂았다” 등 무례한 표현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한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우리의 언어는 과학적이고 창의적이다. 그만큼 표현방법도 다양해서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전달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의 말과 글은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다. 승리의 기쁨을 ‘정벌’로서 표현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유쾌하고 통쾌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언론사와 기자의 능력이자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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