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은 좋은 재료로 만들고 개성 있어야”
코치는 연소득 10만달러 이상의 부유층을 겨냥해 선보인 대중 명품(accessible luxury)으로 현재 미국을 비롯해 아시아 650국에 진출해 있다.
대중 명품을 표방하는 코치에는 뉴욕시 경찰관을 아버지로 두고 빈민촌인 브롱크스에서 자란 프랭크포트 CEO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미국 투자전문지 배런스가 최근 전했다.
프랭크포트 CEO는 청년 시절 공민권 운동과 베트남반전운동에 참여했고, 콜럼비아비즈니스스쿨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1969년에 취득한 후에는 뉴욕시에 취직했다.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79년이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코치와 인연이 닿았다.
뉴욕시 근무 시절 승진이 좌절된 후 친한 동료의 권유로 코치 창업자인 마일스 칸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1979년 코치의 신사업 개발 담당 부사장으로 입사, 프랑스 명품 루이비통을 벤치마크하기 시작했다.
직영점에서만 판매하는 것에서부터 매장 디스플레이 방법, 상품 구비, 서비스, 이미지 관리 등을 눈여겨봤다.
그는 루이비통의 방식을 적용한 직영점을 1981년 뉴욕 매디슨가에 처음 오픈했다.
창업 당시 600만달러였던 매출은 1년 만에 두 배인 1200만달러로 불어났다.
이후 매출은 계속 성장해 1985년엔 1990만달러에 이르면서 업계 안팎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코치가 식품업체 사라리에 인수되면서 프랭크포트 CEO는 모기업의 경영에도 참여했다.
1996년까지 그는 코치 외에 다수의 브랜드를 담당, 대두하는 경쟁사의 위협을 실감하고 코치로 복귀했다.
2000년 사라리에서 분사한 후 코치는 매출 5억달러가 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코치는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 침체도 거뜬히 이겨냈다.
경기 침체에 직면하자 경쟁사들은 앞다퉈 가격 인하에 나섰지만 소비자들을 유인할 만한 가격대의 신제품을 두루 갖춘 코치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프랭크포트 CEO의 경영 철학은 확고하다.
제품은 좋은 재료로 만들어져야 하고 한 눈에 브랜드를 인지할 수 있도록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또한 공급량을 제한해 희소성을 높이는 한편 그 제품을 가진 소비자에게도 메리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 타깃이 쇼핑을 하는 곳에서 부담없이 팔려야 한다는 것도 중시하고 있다.
코치 매장은 프랭크포트 CEO의 의중을 확실히 반영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지갑 스카프 선글래스 구두 등 소품이 줄지어 있고 선반에는 핸드백이 색상별로 진열돼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품이 가격이 아닌 종류별로 진열돼 있다는 것이다.
프랭크포트 CEO는 “소비자는 영리하다”며 “제품별로 가격차가 있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학창 시절,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를 읽은 이래 능력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프랭크포트 CEO는 앞으로 해외 진출에 더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현재는 미국과 일본이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시아 중동 유럽 등지에서도 형평성을 유지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