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정치권 '악연의 역사'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정 명예회장은 앞서 치뤄진 총선에서 31석을 획득하는 등 영·호남 세력 틈에서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정 명예회장은 여세를 몰아 재벌그룹 총수를 지낸 이력을 의심케하는 공약을 던진다.
‘재벌 해체론’이다. 재벌이 국가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작용이 없지 않아 한국경제 전체를 위해서는 재벌기업의 해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정 전 명예회장은 “대통령에 당선되면 계열사 간 상호보증제도를 폐지하는 등 재벌기업의 해체작업에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여기까지였다. 대선에서는 16.3%의 득표율로 3위에 그쳤다. 대가는 혹독했다. 이듬해 현대그룹은 김영삼 정부의 금융제재 속에서 그룹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았다.
◇기업, 선거와의 악연= 선거철 정치권의 단골 공약인 ‘대기업 때리기’는 가장 인기있는 정책메뉴다. 올해도 어김없이 국민 정서를 간파한 정치권은 선거판을 ‘누가 대기업 때리기를 잘하나’를 겨루는 경연장으로 몰아가고 있다. 인물 중심의 과거 선거에 비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을 부추겨 경제민주화라는 명목으로 인기에 영합하는 공약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선거철을 맞은 정치권이 대기업을 옥죄는 이유는 자명하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서민층과 자영업자, 중소기업 종사자들로부터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사이 기업은 각종 규제로 기업활동이 위축될 것을 우려해 경영활동은 커녕 ‘잠수모드’에 돌입한다. 괜히 튀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게 되면 밉보일 수 있다는 부담에서다.
실제로 대기업들은 선거철을 앞두고 투자 및 신규사업 진출을 늦추고 눈치만 보다가 정권교체 후 투자를 단행하는 패턴을 반복해 왔다. 선거가 경제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대기업들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고 있는 밧줄인 셈이다.
지난 2002년 16대 대선이 치러진 시기. 대기업 총수들은 대부분 ‘외유 중’이었다.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대선을 보름 남짓 남긴 12월 2일 일본으로 출국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에 앞서 10월 여수세계박람회 유치 활동을 위해 출국했다가 유치 실패 뒤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11월 말 일본에서 열린 한·일 재계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했다가 대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한 대기업 고위관계자는 “선거철마다 악순환되는 정치권 눈치보기가 과감한 투자와 글로벌 경쟁을 통해 기업을 성장시키는 기업가 정신을 훼손하고 있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국내 기업들은 올해 치러질 총선과 대선의 파장을 우려하고 있다. 예년 선거 때보다 경제에 더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5일 최근 전국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선거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기업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올해 양대 선거가 예년 선거보다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더 부정적’이라는 답변이 56.2%에 달했다. ‘더 긍정적’이란 답변은 31.5%에 불과했다.
예년과 달리 총선과 대선이 겹치면서 다양한 경제정책 공약들이 발표되고 실현되는 과정에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고 경제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이다.
◇기업들 ‘솥뚜껑 보고 놀란다’= 최근 삼성과 현대차, SK, LG 등 대기업들은 정치 이슈에 대한 대응 매뉴얼을 갖추고 상시점검 체제를 가동 중에 있다. 과거에 비해 정치권의 대응에 기민해진 모습이다. 올초 대기업을 주인공으로 골목 상권 문제가 골목상권 논란은 이제 기업형 슈퍼마켓과 대기업 빵집에 이어 식자재 유통업까지 이어지자 삼성과 아워홈 등 대기업들이 발 빠르게 대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과 대기업의 ‘불가근 불가원’ 원칙은 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기업은 정치권의 ‘돈줄’역할을 자청했고, 그 대가로 각종 이권을 챙기며 세력을 확장했다. 반면 정치권의 눈밖에 난 기업은 한 순간에 존폐의 갈림에서 허우적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선거가 치러지는 정치의 계절에는 유독 대립각을 세우는 경향이 많았다.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지는 해에는 긴장감의 고조가 극에 달했다. 현대그룹은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991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갑작스런 세무조사를 당해야 했다.
정몽헌 당시 현대상선 사장은 세금 포탈 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며, 6남인 정몽준 당시 국민당 의원도 일명 ‘부산 초원복집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정 전 명예회장은 낙선 직후 ‘비자금’ 문제로 업무상 횡령과 선거법 위반죄로 사법처리되기도 했다.
이 기간 대기업 총수들에게도 시련이 컸다. 직접 선거에 뛰어들었던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그랬고 삼성, 현대, SK 등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은 불법 대선자금 제공 혐의로 검찰에 줄소환됐다. 불법 대선자금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던 2002년 대선의 경우 모금에 관여한 기업인 13명이 형사 처벌됐다.
그룹 총수의 대선 출마설이 퍼지면서 계열사 주가가 동반 급락한 사례도 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의 대선출마설이 퍼지면서 그룹주 전체가 출렁거렸다.
김우중 전 회장의 대선 출마설이 최초로 불거진 그해 10월 24일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무려 13.48포인트가 급락한 557.86을 기록했다. 오른 종목은 상한가 33개를 포함해 102개에 불과했던 반면 내린 종목은 하한가 178개 등 712개에 달했다. 특히 대우그룹 계열의 9개사 21개종목은 거의 대부분 하한가를 기록했다
◇선거자금 지원은 정·재계 합작품=선거자금 문제는 가장 민감한 정치의 아킬레스건이다. 선거자금은 ‘차떼기·돈봉투’라는 별칭과 함께 드물지 않게 정치인의 명운까지 갈라놓는다.
이같은 광경은 정치권과 대기업 간의 합작으로 이뤄진다. 재벌들은 신규 사업 진출과 금융 특혜, 행정 지원이 필요했고, 정치권은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992년 대선 당시 재계는 전경련을 창구로 30대 그룹이 50억원의 선거자금을 모아 선거관리위원회에 기탁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5대 그룹을 포함한 주요 재벌들이 보험성격의 선거자금을 당시 여당후보였던 김영삼 대통령 측에 전달했다는 것이 재계의 통설이다.
또 1996년 대선 때에는 재벌그룹 한 곳은 당시 이회창 후보가 우세하다는 분석이 절대적이었으나, 김대중 후보에게도 정치자금을 전달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선거자금과 관련해 재계 관계자는 “최근 정치권으로부터 자금요청을 받은 적도 없고 먼저 줄 생각도 없다”며 “요즘같이 국내외투자가들의 감시 눈길이 살벌한 판에 어떻게 회사 자금을 정치자금으로 줄 수가 있겠느냐”는 말했다.
한편 재계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는 올해 순이익률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대선이 치러진 13대(1987년)부터 17대(2007년)까지 10대 대기업집단의 선거 당해연도 순이익률(매출액 대비 순이익 비율)이 직전 연도에 비해 평균 0.31%포인트 줄었다.
14대 때인 1992년 순익률이 0.10%포인트 증가한 것을 빼면 4차례 모두 마이너스 증가율을 보인 것. 순익률 감소폭은 16대 대선이 치러진 2002년이 0.67%포인트 감소해 가장 컸다. 13∼17대 대선 당해연도 10대 그룹의 순이익도 직전연도에 비해 평균 8.00%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매출은 평균 5.90% 증가했는데, 13∼15대는 17∼19%대의 매출 증가율을 기록했지만 16대인 2002년에는 6.70% 감소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16대 대선이 치뤄진 2002년에는 외환위기 사태를 넘기고 월드컵 특수가 있었음에도 대기업들의 매출과 순이익·순익률이 모두 좋지 않았다.이때 10대 그룹의 경영실적은 역대 대선 중 가장 최악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17대 대선이 있었던 2007년에는 대기업의 매출과 순이익은 좋았지만 순익률은 전년대비 0.15%포인트 하락했다.
재계 관계자는 “올해는 유럽 재정위기 등 글로벌 경기 침체에다 선거로 인한 정책적 부담이 가중돼 순익 전망이 밝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