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성격·지나친 자긍심이 국수주의로 왜곡될 수도
차기 중국을 이끌 시진핑(習近平) 국가 부주석은 1963년 혁명 원로인 시중쉰(習仲勳)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타이즈당(太子黨, 중국 고위층 인사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당)으로 분류된다.
혁명 원로의 아들이었지만 소년 시절은 고됐다. 부친이 문화대혁명으로 숙청되면서 그는 자신이 태어난 산시성으로 쫓겨가 고된 노동을 하며 보내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부친이 복권된 뒤에야 그는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1975년 22세에 칭화대 공정화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그는 1979년 중앙군사위 판공실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중앙보다는 지방 근무가 많았다. 1982년 허베이성 정딩현 부서기, 1985년 샤먼시 부시장, 1990년 푸저우시 당서기, 2000년 푸젠성장, 2002년 저장성 당서기,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를 지낸다.
타이즈당 출신의 도련님이었던 그에게 산업화가 앞선 동부 연안 지역 근무는 경제 분야의 경험을 쌓기에 충분했다. 이들 지역은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돼 1980년대 이후 개혁 개방의 수혜를 톡톡히 본 곳들이다.
그가 정치적 두각을 나타낸 것은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파의 리더인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상하이방(상하이를 기반으로 입신한 정치인)의 대부로 통하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시기인 2006년. 당시 상하이방의 일원인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서기의 비리사건이 계기가 됐다.
타이즈당 소속인 그는 상하이 당서기에 취임한 뒤 이 사건을 무난히 수습했다. 이때 공청단파와 상하이방 양쪽에서 “정치력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가 나왔다.
시 부주석은 그 직후 열린 2007년 10월 당 17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차기 지도부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는 대중적인 인기도 얻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준비팀장을 역임한 데 이어 2009년에는 톈안먼 사태 20주년 대비팀장 등을 맡았고, 2010년 5월 김정일 방중 당시에는 후 주석의 오른 팔 역할을 했다.
시 부주석은 타이즈당을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신중한 성격과 됨됨이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시 부주석의 이같은 점을 경계하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그에 대해 “워낙 말이 없어 속을 알 수 없는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의 부패 척결과 공격적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중국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그의 과도한 애국심이 국수주의로 왜곡될 수도 있다. 그를 두려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