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정체 속 한정된 파이 놓고 과당경쟁…돌파구 찾기 고심
국내 유통업계가 내수시장에서 기로에 섰다.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글로벌 기업으로 재도약하는 한 해를 만들자” 2011년 새해를 맞이하는 롯데, 신세계 등 주요 유통업체 CEO들의 신년사를 들여다보면 표현이나 형식은 다르지만 대부분 ‘재도약’에 방점이 찍혀있다. 유통업체들이 너도나도 재도약을 천명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현재의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이야기다.
대형마트는 2007년 10.2%가 성장했지만 2008년 6%, 2009년에는 3.9%로 판매액이 급감했다. 슈퍼마켓도 2007년 1.3%에서 2008년 10%로 깜짝 증가세를 나타냈지만 2009년에 다시 4.2%로 감소했다. 편의점도 2008년 16.1% 증가를 정점으로 2009년에는 13.2%로 다소 감소한 수치를 나타냈다.
지난해 유통업계는 기업형슈퍼마켓(SSM) 출점이 주요 이슈였다. 대형마트보다 작은 규모인 SSM 입점을 둘러싸고 지역상권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등 사회문제로 비화돼 전 국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결국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일명 유통, 상생법 개정안이 통과돼 규제를 받게 되면서 공격적인 출점이 어렵게 됐다.
유통업체들이 기존 대형마트에 더해 SSM 출점에 나섰던 것은 대형마트들이 다점포 구축에 따른 경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SSM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결국 국내사간의 치열한 경쟁 후 또 다른 먹을거리를 찾으면서 중소상인들과 충돌을 낳았다. 업계 관계자는 “백화점 부문의 매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이는 주식시장 활황에 따른 효과”라며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한 매출은 한계가 명확하다”고 분석했다.
지나친 출혈경쟁을 우려한 대형마트 3사가 경쟁을 자제하면서 ‘10원 전쟁’은 한 때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12월에는 토종 대형할인마트인 이마트 구성점과 외국계 할인매장인 코스트코 양재점이 ‘신라면’가격을 손해를 보면서까지 인하해 새로운 출혈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식품업체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도 계속됐다. CJ제일제당과 풀무원이 ‘두부시장’을 두고 제조법 논란을 일으키며 서로를 헐뜯었고, 최근에는 ‘우동시장 점유율’로 신경전을 벌였다. 또 CJ제일제당과 대상은 ‘고추장 성분’과 ‘조미료 포장’ 카피 논란을 벌이며 대립각을 세웠다.
이처럼 유통업계가 제살깎기식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이미 내수시장이 포화상태이기 때문이다. 파이가 정해져 있는 한정된 시장에서 성과를 내려다보니 각 업체들이 특징이 없는 제품을 우후죽순처럼 내놓았고 결국 분야별로 출혈 경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구가 1억2000만명이 넘는 일본에서도 최근 내수시장이 좁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시장은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지난해부터 ‘상생경영’으로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는 정부의 정책도 내수시장에만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상생경영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무리한 출점과 물량공세 등을 펼 수 없기 때문이다.
롯데백화점 유통전략연구소가 지난해 연말 발표한 2011년 소매유통업에 대한 전망과 주요 이슈에 따르면 올해 유통업계 매출은 6.2%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연구소측은 올해 경제상황에 대한 불확실성과 물가상승 압박은 여전하지만 가계 구매력이 개선되고 내수시장이 활성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국내 경기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신세계 유통산업연구소의 경우는 가계부채 증가와 소비 부담, SSM 및 대형마트에 대한 정부규제 현실화 등으로 성장세가 다소 둔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해외진출 어려워 사업다각화로 선회(?)=해외 진출이 어려운 기업들은 꽉 막힌 내수시장에서 돌파구를 마련키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업다각화를 선택한다. 식품업계에서는 이미 포화상태인 시장에 진출한 업체들도 있다. 매일유업은 일본업체와 손잡고 카레시장에 진출했고 롯데칠성과 남양유업은 커피믹스 시장에 나란히 뛰어들었다.
농심은 카페전문점 등 프랜차이즈 운영을 시작했다. 삼양식품과 웅진식품은 시리얼제품을 내놨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며 “2∼3년 전부터 신사업 진출이 활발해졌고 아직 뚜렷한 성적표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건강기능식품 시장은 식품·제약업체를 중심으로 각축을 벌이는 신 경쟁시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롯데제과와 동원F&B, CJ제일제당, 웅진식품 등은 각각 홍삼시장에서 출사표를 던지고 경쟁을 본격화했다. 한국야쿠르트는 건강기능식품 ‘브이푸드’를 내세워 건기식 시장에 진출했다.
올해 유통업계는 전체적으로 지난해 7~8%의 성장률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대형마트와 SSM, 식품업계는 국내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든 만큼 큰 폭의 상승세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새해 처음으로 지난 6일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제8차 유통위원회에서도 유통업계의 저성장에 대한 전문가들의 우려가 이어졌다. 이날 주제발표에 나섰던 윤병석 보스턴컨설팅그룹 파트너는 “국내 유통산업이 이제 성숙단계에 들어서 지금처럼 높은 성장률은 기대하기 어렵다”며 “앞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소비자에 대한 이해, 신흥시장 진출, 틈새공략 등 3가지 요소가 고려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 파트너는 “다른 나라보다는 안정성이 보장된 중국 등 해외 인접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사업기회가 확대되고 있다”며 “해당시장을 노려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한집 건너 한집' 브랜드숍…포화시장의 단면=휴일의 명동거리. 미샤, 페이스샵 등 수많은 화장품 회사의 로드숍들의 판매원들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으로 치열한 판촉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내수시장의 포화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화장품 브랜드숍이다. 서울시내 대표적인 중심상권인 명동과 강남 일대를 보면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화장품 브랜드숍이 즐비해있다.
장사가 잘 되려면 유사업종이 밀집해 있는 곳에 입점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지나친 경쟁으로 이들 브랜드숍들은 박리다매식 경쟁만을 펼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특정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고객들도 있지만 매일 반값 세일을 실시하는 등 파격적인 판매조건을 내걸지 않으면 손님을 끌어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아모레퍼시픽이 지난해 발표한 ‘올해 화장품 시장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화장품 시장은 로드숍을 중심으로 전년대비 6.5%의 안정적인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로드숍 시장 규모는 전년대비 8.8% 성장한 2조132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직영점 형태에서 프랜차이즈 형태로 변하면서 그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측했다.
명동이나 강남처럼 소비자들이 몰리는 지역 외에 브랜드숍이 입주하면서 시장규모가 커질 수는 있지만, 결국 새로운 판매지역을 찾는 화장품 업체들로 제2, 제3의 명동, 강남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최근 가치 소비에 대한 고객인식이 확산되면서 브랜드숍에 대한 선호도가 당분간은 지속이 되겠지만, 지금과 같은 출혈경쟁이 지속되면 결국 공멸(共滅)하게 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선애 기자 l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