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졌다하면 수백억’…정치권 규제 프레임 갇힌다 [횡령의 땅, 규제의 그림자 下]

은행권 역대급 실적과 맞물려 거센 비판
가산금리 손질, 대주주 금지행위 확대 추진
상생금융 압박⋯"민간금융 자율성 침해 우려"

금융사에서 잇따라 발생한 횡령 사고가 정치권의 규제 논리를 자극하는 빌미가 되고 있다. 특히 주요 시중은행에서 수십~수백억 원대의 횡령 사고가 반복되자 규제 강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여기에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상생 금융’ 요구까지 더해지며 정치권의 압박의 수위가 더 높아지고 있다.

7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국내 금융업권 횡령 사고 현황’에 따르면 최근 4년여간(2021년~2025년 2월) 발생한 금융권 임직원 연루 횡령사고의 80% 이상(사고 발생 건수 기준)이 은행권에서 발생했다. 특히 같은 기간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 발생한 횡령 사고 건수는 총 56건으로 전체 사고 건수의 51.3%를 차지했다. 횡령액은 941억9400만 원으로 52.9%에 달했다.

은행별 횡령사고 건수는 NH농협은행이 16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하나은행(13건), 우리은행(11건), 신한은행(10건), KB국민은행(6건) 순이다. 횡령액 기준으로는 우리은행이 725억1900만 원으로 최고액을 기록했으며 △농협은행 155억8100만 원 △하나은행46억9800만 원 △신한은행 11억5300만 원 △국민은행 2억4300만 원 등이었다.

국책은행과 지방은행도 금융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IBK기업은행에서는 최근 5년간 8건(55억4000만 원)의 횡령 사건이 일어났다. 최근에는 800억 원대 부당대출 혐의로 전현직 직원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경남은행의 경우 2023년 발생한 단 한 건의 횡령 사고로 595억2000만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은행권의 반복된 사고는 고액 연봉 체계, 역대급 실적과 맞물리며 정치권의 비판을 더욱 키우고 있다. 주요 시중은행은 이자 이익을 중심으로 수년째 최대 순이익 기록 경신 행진을 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임직원 평균 연봉도 1억 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인영 의원은 "은행권의 실적 행진 뒤에는 내부통제 실패로 인한 조직 내 비리가 만연한 상황"이라며 "성과에 비해 통제와 책임이 부실한 가운데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제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이 국민 정서에 민감한 정치권의 매서운 반응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국회에서는 은행법 개정안이 패스트트랙으로 추진 중이다. 해당 개정안은 가산금리 산정 시 포함되는 항목 가운데 각종 보증기금 및 재단에 출연하는 금액을 50%만 반영하도록 조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은행권 자체 분석에 따르면 출연금 규모는 2023년 기준 약 3조 원 수준으로, 법안이 통과되면 이 중 절반 수준만 가산금리에 반영할 수 있게 된다. 은행권은 수익성 저하 우려를 제기하며 의견을 전달하고 있으나 국회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학영 민주당 의원이 은행 경영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기 위한 은행법 개정안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은행 대주주의 부당한 영향력 행사의 금지 요건에 ‘제3자에게 이익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를 추가함으로써 대주주의 금지행위 범위를 확대하는 게 골자다.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추진했던 은행의 과도한 이자수익에 기여금을 물리는 '횡재세(초과이익환수)'가 상생금융의 형태로 다시 등장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벌써 정치권은 은행에 상생 기여나 부담금 확대 등을 언급하며 압박에 나서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일부 금융회사에서 반복적으로 사고가 발생한 점은 분명히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면서도 "개별 사례를 일반화해 전체 금융권에 대한 지나친 규제나 정치적 압박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어 "무엇보다 정치적 명분에 의한 시장 개입이 과도해질 경우 금융회사의 자율성까지 해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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