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 제1조 2항이다. 국민주권주의를 규정한 이 선언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준엄하다. 1948년 제헌 헌법 이후 문구 하나 바뀌지 않은 헌법 조문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 조항이 눈에 띄는 점은 헌법 조문에 단 한 번 나오는 ‘권력’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국민이 권력의 원천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에 반해 헌법은 행정·입법·사법권에 대해서는 ‘권한’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면서 이 모두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가 거대한 소용돌이에 빠졌다. 대법원이 1일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면서 대선 정국은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대법원은 이 후보의 이른바 김문기 골프 발언과 백현동 용도 변경 관련 발언 등이 허위사실 공표라고 판단했다. 법원의 판결은 존중되어야 마땅하지만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상고심 진행 속도는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이 후보 측이 ‘사법의 정치화’라고 비판할만한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파기환송심을 맡는 서울고법도 바로 다음날 재판부를 배당하고 첫 기일을 15일로 잡는 등 속도를 내고 있다. 대선까지 남은 기간이 촉박해 최종 판결이 확정될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사법부의 이례적 속도전을 감안하면 이 또한 장담할 수 없어 보인다.
국정은 더 혼란스럽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선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한 전 총리는 “대한민국이 기로에 서 있다”는 상황 인식하에 “더 큰 책임을 지는 길”을 택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사퇴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다.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을 승계할 것으로 예상됐던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마저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전격 사퇴했다. 이에 따라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대대대행’을 맡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됐다. 국정 공백이 커지고 난맥상이 심화한 것인데 이 모든 게 하루 사이에 벌어졌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외신들은 대법원 판단과 연이은 국정 난맥상을 짚으며 한국이 정치적 불확실성에 빠졌다고 앞다퉈 진단하고 있다. 특히 블룸버그 통신은 “정치적 위기를 심화하는 또 다른 충격적 전개”라고 평가하며 “윤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권한대행이 끊임없이 교체되는 ‘리더십 회전목마’ 상황은 대미 관세 협상에서 한국의 취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2·3 비상계엄 이후 대통령 파면, 권한대행의 사퇴, 경제부총리의 탄핵 직전 사퇴까지 국가 운영의 연속성이 무너졌다. 흔들리는 국정과 불확실한 미래에 국민들은 불안하다.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 대혼돈에 빠진 것인데, 행정·입법·사법 모두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권력으로 오인하고, 개인의 정치적 이해와 생존을 위해 헌법적 책임과 공적 책무를 저버린 때문이다. 정파적 이해에 갇혀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책임 회피와 정치적 계산에 몰두하는 것은 국가의 시스템을 와해시키는 일이다.
권한은 국민이 위임한 것이고, 그 책임은 엄중하다. 위정자는 국민 앞에 겸허해야 한다. 국민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법과 원칙을 흔들고 정의마저 비틀어서야 되겠는가. 과연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지를 그 준거로 삼아야 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명제를 다시 새겨야 할 때다. 일찍이 리 호이나키가 설파했듯이, 비틀거려도 정의의 길로 가야 하기에.
김동선 사회경제부장 matth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