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경 사회경제부 차장
용산 한남동 관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대통령만큼 그 사이 우리나라도 겉으론 멈춰선 느낌이다. 하지만 안으로 사법 시스템은 상처를 받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법치주의가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컸다.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이름을 올린 적 있는 법조계 고위 인사는 “사법 질서에 수긍해온 일반 시민들에게 사법부 결론마저 힘 있는 자가 뒤집을 수 있다는 잘못된 선입견들이 자리 잡을까 심히 염려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되면 그간 우리가 희생이란 대가를 치러 발전시켜온 헌정 질서는 무용지물이 된다”고 덧붙였다.
“이 나라에 법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윤 대통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출석하면서 영상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한탄했다. 이같이 판단하는 근거가 서로 간 입장차에 따라 다를지라도 진영과 정치이념을 떠나 현 상황에 관한 인식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법치주의 손상 원인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그 근원을 제공한 책임은 누가 질지는 앞으로 공수처는 물론 경찰‧검찰 수사와 이어질 법원 형사재판, 그리고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을 거쳐 시시비비가 가려질 문제다.
바라는 건 이 모든 절차가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사법절차 내에서 다퉈져야 한다는 점이다. 수사가 불법하게 진행된다면 수사당국 조사에 응해 불법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체포와 구속이 부당하다면 적부심사로 법정에서 방어권을 행사해야 한다. 판결에 불복한다면 3심제를 활용해 합리적인 법 논리를 개진해야 한다.
그동안 국민 전부가 따라온 약속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신뢰는 깨진다. 법학을 또 다른 언어로 규범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우리는 ‘사람을 해치지 말자’고 공감대를 형성했다. 인류는 글로 적어 ‘살인죄’란 법률을 만들었다. 이를 어겼을 때 형벌을 규정해 약속의 구속력을 높였다.
사회는 만인에게 평등한 잣대로 작용하는 룰을 지키는 에티켓에서 성숙한다. 단순히 국부(國富)가 많다고 선진국이 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을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최근 만나는 재계 인사들은 수출 라인이 일부 빠지고 있다고 하나같이 걱정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 기업은 매출 대부분이 해외시장에서 나온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비할 겨를 없이 국내 이슈에만 갇힌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길어지고 있다고 푸념한다.
산업계 관계자는 “해외 공장들로부터 한국 본사 상황을 수시로 확인하는 전화에 화상 회의까지 몰려 너무 피곤하다”고 호소했다. 각국 시차 차이가 있어 글로벌 지사들을 안심시키는 연락을 취하다 보면 밤낮 없이 일하게 된다고 한다.
판결에 불만이 있을 수 있고 비판을 가할 수 있다.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다. 판례 평석을 통한 판결문 분석은 부족한 법리를 채워 넣어 미래 더 나은 재판을 위한 연구 활동이다. 학문의 자유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여론 몰이와 지지세를 결집하려는 정치역학을 염두에 둔 계산된 행동은 국론을 분열시킨다. 법률가는 필요 없고 로비스트가 판치는 세상이 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시대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대한민국이 후퇴하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대통령으로서 품격을 기대한다. 위기 앞에 한 마음으로 뭉쳤던 대한민국 회복력을 믿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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