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너머] 유상증자할 결심
“요즘 기업 유상증자에 대한 금융당국의 경계감이 커지고 있는 것 같다. ”
최근 만난 증권사 기업금융(IB) 부서 관계자의 전언이다. 기업이 유상증자를 결정하면 금융감독원이 증권신고서를 정정 요구하는 방식으로 제동을 거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금감원은 전날(2일) 이수페타시스의 5500억 원 규모 유상증자를 한 차례 반려시켰다. 증권신고서가 형식을 갖추지 않았거나 내용 측면에서 투자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며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하면서다.
지난달 고려아연의 2조5000억 원 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사실상 ‘제지’당한 지 한 달만이다. 금감원은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추진 경위나 의사결정에 대해 자세히 공시하지 않았고 유증 실사 기간에 의문이 있다며 증권신고서를 다시 쓰라고 요구했다. 고려아연은 정정요구를 받은 지 6일 만에 유상증자를 자진 철회했다. 이밖에 올해 금양 등이 유상증자를 계획했다 금감원으로부터 반려당했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유증이 주주가치 훼손한다며 투자자들의 비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수페타시스는 유상증자로 조달한 자금 중 절반 이상을 코스닥 상장사 제이오를 인수하겠다고 밝혔는데, 시장에서는 이수페타시스의 본업과 관련이 크게 없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지 우려가 쏟아졌다. 투요 주요 판단 사안인 유증 계획을 정규장이 마감한 후 공시해 ‘올빼미 공시’ 논란도 불거졌다. 공시 다음 거래일인 11일 이수페타시스는 22.7% 급락했다.
고려아연은 경영권 분쟁에 사용할 자금을 개미(개인 투자자)의 돈으로 조달한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주주권익을 보호하겠다며 자사주를 공개매수해 소각한다고 하더니 유상증자로 오히려 유통 주식 수를 늘리는 ‘모순’되는 결정을 하면서다. 유증 발표 당일날 고려아연 주가는 30% 폭락해 하한가를 기록했다.
물론 모든 유상증자가 나쁜 것은 아니다. 주식 수를 늘려서 자금을 조달하는 유상증자는 기업의 시설투자나 신사업 진출 등 성장을 위해 필요한 방법이다. 다만 발행 주식 수가 늘어 주가가 하락하는 상황이 필연적이라면 기업도 주주가치 희석 방지를 위해 사내유보금이나 회사채 발행 등 대안은 없었는지, 자금 사용의 목적이 타당한지 등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금융당국이 연달아 논란이 되고 있는 유상증자를 막은 것은 주주가치를 희석시키고 국내 증시에 대한 실망감을 키우는 기업의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한층 엄격해진 분위기 속에 이제 기업은 유상증자 결정에도 책임을 감수하는 큰 결심이 필요하게 됐다.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에 역행한다는 실망과 분노가 쏟아지고 있다. 모두가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 증시 저평가)’가 문제라고 입모아 하지만 정작 국내 증시 회의론을 불지피는 것은 증시가 꼭 필요한 국내 기업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상장사들이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지점이다.
증시 신뢰 회복을 위해 상법 개정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다시 힘이 실리는 이유기도 하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자는 상법 개정안은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주의 이익 좀 제발 고려해달라는 호소문과 같은 셈이다. 소송남발 등 부작용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할 사안이지만 주주보호 노력에 대한 입법 취지는 지금 상황에서 공감 못할 투자자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