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서 '철저한 현지화'로 뿌리내리는 韓은행 [K-금융, 퀀텀점프③]

입력 2024-10-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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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화' 힘쓰는 국내 은행
금융감독당국 규제는 걸림돌
인력-업무 불균형 해소 필요

동남아시아 모든 공항에서 우리나라 금융회사의 광고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됐다. 1967년 한국외환은행(현 하나은행)이 동경, 오사카, 홍콩지점을 동시 개설하면서 해외에 첫 깃발은 꽂은 지 58년 만이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금융사들은 단 한번도 멈추지 않았다. 꾸준한 인수합병(M&A)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점포도 늘렸다. 신사업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글로벌 경기 부진과 현지 기업들의 성장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시적인 부침을 겪고 있으나 그 동안 뿌렸던 씨앗은 언제든 수확할 수 있는 열매로 자라났다.
최근 세계로 비상하는 ‘K산업’을 통해 또 한번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금융당국도 금융사의 해외 진출 지원을 위해 각종 규제를 없애며 힘을 실어주고 있다. ‘퀀텀 점프’할 준비가 돼 있는 한국 금융사들의 글로벌 전략을 짚어본다.

▲지난달 25일 인도네시아 하나은행 법인과 IBK기업은행 법인 건물 사이 도로 한 쪽에 길게 늘어선 노점상에서는 BRI(Bank Rakyat Indonesia)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인 ‘BRImo’로 결제를 하면된다고 홍보하고 있었다. BRI는 1895년 설립된 자산규모 2위 은행으로, 인도네시아 정부가 53%의 지분을 보유한 국영은행이다. (유하영 기자 haha@)

“익숙하지 않아서.(Unfamiliar.)” 하나·우리·IBK기업은행 등 한국계 은행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현지 택시 기사에게 “왜 쓰지 않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도심 빌딩 외벽에서 한국계 금융사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아직 현지 사람들의 일상에까지는 녹아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현지 은행의 입김이 세고, 외국계 은행이 고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인도네시아 내 자산 규모로 보면 KB국민·우리·하나은행은 105개 은행 중 20~30위권이고, 신한·IBK기업은행은 50~60위권이다. 상위 4개 대형은행(만디리·BRI·BCA·BNI)은 모두 인도네시아 전통은행이다.

본지가 지난달 23일부터 25일까지 인도네시아 중앙·남부 자카르타에서 본 한국계 은행들은 이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같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은행 산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지도 제고, 현지 인력 소통 강화 등 각종 ‘현지화 전략’에 한창이었다.

IBK기업은행 인도네시아 법인은 최근 현지 직원을 대상으로 ‘커뮤니티 오브 프랙티스(Community of Practice·CoP) 2024’를 열었다. 현지 인력이 조직에 융합할 수 있게 지원하는 역량·소통 강화 프로그램이다. 올 4월부터 5개월간 현지 직원들이 4~5명씩 학습 조직을 구성해 신상품·제도 등 은행 업무 전반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지난달 말 결과를 발표해 1·2·3위를 뽑았다. 올해 처음 도입된 이 프로그램은 앞으로 매년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IBK기업은행 계좌를 가진 사람이 모바일뱅킹 애플리케이션(앱)에서 바로 큐리스(QRIS) 결제를 할 수 있도록 QR 시스템을 개발, 출시 준비 중이다. 현지인들이 인도네시아 QR코드 표준 결제 시스템인 큐리스로 소비생활을 많이 한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기은 관계자는 “중소기업을 주된 고객군으로 하지만, 해당 기업의 직원 등 연관된 개인 고객이 많아 관련 편의 기능, 상품과 서비스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은행 인도네시아 법인은 2017년 ‘디 카페 하나라운지(D’Cafe Hana Lounge)’ 문을 열고 은행 영업점을 찾은 고객이나 현지인이 모두 자유롭게 카페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신한은행 인도네시아 법인은 대학생 공개채용 프로그램인 ‘캠퍼스 하이어링(Campus Hiring)’을 시작했다. 또, 현대자동차와 협업해 신차 구매 시 맞춤형 금융 제안을 하는 서비스 ‘마이카 론(My CAR Loan)’, 예금 이자 금액의 5% 내로 은행과 고객이 동일 금액을 기부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정기예금’을 개발하는 등 현지 맞춤형 상품 제공에도 힘쓰고 있다.

▲지난달 24일 오후 2시 30분께 남부 자카르타 하나은행 본사 건물 1층 영업점 옆에 있는 ‘하나라운지’에서 현지인들이 커피를 사고 있다. 하나은행은 현지 커피 프랜차이즈와 계약을 맺고 현지인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유하영 기자 haha@)

국내 은행의 성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인도네시아 금융감독청(OJK)의 인력 관련 규제다. 현재 대다수 한국계 은행에는 한국 주재원이 10명 안팎으로 파견돼 있는데, 과거와 비교하면 절반 정도 줄어든 수준이다. A은행 관계자는 “본국 직원 수를 계속 줄여나가라는 것이 OJK의 지침”이라며 “사실상 한 자릿수를 유지하라고 한다”고 토로했다.

이마저도 한국 직원은 4년간만, 영업점이 아닌 본사에서만 근무할 수 있다. 4년 근무 이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이후 부행장 등 ‘임원’ 자리로만 복귀 가능하다. 오랜 시간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이다.

적재적소에 인력을 빠르게 투입하기도 어렵다. OJK에 따르면 외국계 은행은 현지의 본사 직원이 담당 업무를 변경하는 경우, 기존 업무 허가 비자를 반납하고 새로운 담당 업무에 근거해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 승인까지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석 달 정도 걸리고, 그간 해당 직원은 ‘대기’ 상태에 놓여 관련 업무를 할 수 없다.

신사업 승인 관련 규제로 신규 상품·서비스 출시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도 한계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은행이 결제 서비스 등 신사업을 하려면 매년 초 연간 사업 계획서에 사전 보고해야 하고, 인도네시아 중앙은행(BI)과 OJK에서 승인받아야 한다. 한국계 B은행은 출시 준비 중인 카드 상품과 관련해 올해 1월 BI와 OJK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지만, 약 9개월이 지난 지금도 승인 대기 상태다.

현지 감독당국의 규제는 향후 국내 금융사 경쟁력 확보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인도네시아는 은행 산업 성장성이 큰 나라로 꼽히는 만큼 계속해서 업무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력-업무 간 불균형’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국내 은행 내 고민거리가 된 지 오래다. 한국계 C은행 관계자는 “현지 한국 직원 수가 줄어드는 사이, 이미 은행 자산규모와 비즈니스 라인업은 확대됐다”며 “소수 인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 지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이 같은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금융감독원의 과도한 보고자료 요구는 현지 한국계 은행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하는 요인이다. 한국계 D은행 관계자는 “10명 안팎으로 많지 않은 한국 주재원들이 근무 시간의 70%가량을 금감원 요구 자료 작성에 쓰고 있다”며 “시간을 두고 필요한 사항만 보고할 수 있게끔 간소화해 현지 특화 상품·서비스 개발 등 더 생산적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한국계 E은행 관계자의 경우 “현지 법인 감독은 현지 감독 당국에 맡기고, 연내 1회 정도 해외 투자 관리 차원에서 들여다보는 식으로 관리 감독을 합리화하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현지 은행권에 따르면 OJK는 1년에 한 번 정기 검사를 하는데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간 진행된다. 이때 특정 차주에게 대출을 내준 건을 개별적으로 지적하는 등 상세한 검사가 이뤄진다.

단기간 내 성과를 재촉하는 국내 분위기도 현지에서 자리를 잡는 데 방해가 된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리테일 고객을 확보하고 자산규모도 큰 현지 플레이어들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에 아무리 K-금융이 고도화했다고 해도 현지 영업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해외 영업이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점에 대한 금융당국의 이해와 일관성, 지속성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도네시아 중앙 자카르타 타나 아방 지역의 육교에서 내려다본 도로의 모습. 멀리 ‘한화생명’ 로고가 적인 건물이 보인다. 그 앞에 있는 빌딩 외벽에는 독일의 보험, 금융 서비스 기업인 ‘알리안츠(Allianz)’ 로고가 적혀 있다. 한 한국계 은행 관계자는 “현지 한국기업들은 한국계 은행들의 ‘집토끼’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무조건적인 거래가 보장돼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며 “실제 인니에 진출한 한국기업 중 한국계 은행이 아닌 BCA, BRI 등 규모가 큰 현지 대형은행들과 거래하는 곳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 고객 확보를 위해 손실을 감수하는 수준의 혜택 제공 등을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하영 기자 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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