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사업은 무법지대?...갑질 '무방비' [하도급법 사각지대②]

입력 2024-06-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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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공정거래위원회에는 나이키가 국내 한 신발 소재 납품 업체에 갑질을 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납품 단가를 깎고 손실 비용을 떠넘겼다는 것이다. 다만 관련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인 튀르키예 차나칼레 대교 건설 현장에서 국내 업체들 간 갑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공사에는 국내 대형 건설업체 두 곳이 참여했다. 이들로부터 하청을 받은 국내 업체는 공사 기간이 길어졌는데도 추가로 들어간 비용을 받지 못해 논란이 일었다.

공정위는 두 사건 모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하도급법 적용 대상을 국내 기업 간 원·하청 계약으로 국한했기 때문에 외국 기업(정부)은 법 적용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조사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첫 번째 사례는 나이키가 외국 기업이라는 이유를, 두 번째 사례는 공사를 발주한 주체가 외국 정부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런데 올해 4월 한 국내 대기업이 해외에서 하도급 거래를 하면서 부당한 특약을 걸었다가 공정위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았다. A사는 2018년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정유회사로부터 폐열회수처리시설 공사를 수주하고 하도급업체와 계약을 맺으면서 계약서에 재작업, 추가작업 또는 보수작업으로 발생하는 비용 가운데 하도급업체의 책임이 없는 비용도 하도급업체에 전가하는 특약을 설정했다. 공정위는 현장이 UAE였지만 A사와 하도급업체 모두 국내에 건설업 등록이 돼 있다며 하도급법을 적용했다.

공정위가 ‘하도급법의 역외적용 관련 정책 방향’에 대한 연구 용역을 추진하는 것은 이처럼 해외에서 발생하는 갑질에 하도급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해외 현장에서 갑질은 계약 단계부터 발생한다. 영문계약서를 작성하면서 국내 하도급법을 위반하는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로 이행보증 기관을 특정해 과한 보증서를 작성토록 하거나 공사 지연에 대한 책임 전가, 공사비 증액 차단 등 원사업자에게 유리한 내용이 여과 없이 들어간다. 분쟁이 발생하면 소송이나 중재를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해야 한다는 특약 등도 설정된다.

▲서울 시내 한 공업사에서 작업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뉴시스)

계약이 국내법을 피해 현지에서 설정되고, 원사업자가 현지 합작 법인을 설립해 운영하다 보니 국내법 적용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부당한 갑질에 대해 공정위에 제소해도 행정제재 대상이 현지 법인이라 처벌하기 힘들고 공정거래조정원으로 가도 권한 자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에 민사 소송을 하려고 해도 해외라는 특수성에다 분야별 전문성을 가진 인력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해외 중재기구를 이용한다고 해도 국제형사재판소(ICC) 중재 등은 비용이 10억 원 이상이 들어가고, 이마저도 할 수 없도록 설정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해외에서의 갑질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다 보니 불공정행위가 대담하게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에서는 해외 건설 현장 등에 참여하려면 불공정행위를 감안하고, 원사업자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모든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다만 하도급법의 확대 적용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하도급법을 적용하는 국가가 거의 없는 데다 기업 간 분쟁의 경우 민사 소송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하도급법이 역외로 적용되면 해외 진출 기업의 경쟁력을 낮추는 요인도 될 수 있다”며 “규제가 강화되면 국내 기업 대신 상대적으로 의무에서 자유로운 해외 기업과 계약을 맺는 경우도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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