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권리” vs “태아도 생명”…프랑스 '낙태자유'에도 논란은 ‘ing’ [이슈크래커]

입력 2024-03-05 16:33수정 2024-03-0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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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현지시간) 프랑스 상원과 하원이 합동회의를 열고 낙태 자유를 명시한 헌법 개정을 승인하자 파리의 트로카데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껴안으며 축하하고 있다. (AP/뉴시스)
프랑스가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명시한 헌법을 갖게 됐습니다. 헌법 개정안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됐는데요. 이에 따라 프랑스는 세계 최초로 헌법상 낙태할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프랑스 상원과 하원은 4일(현지시간) 파리 외곽 베르사유궁전에서 합동회의를 열어 헌법 개정안을 표결한 끝에 찬성 780표, 반대 72표로 가결 처리했습니다. 표결에는 양원 전체 의원 925명 가운데 902명이 참석했으며, 개헌에 반대했던 제라르 라셰 상원 의장 등 50명은 기권했습니다.

개헌에 따라 프랑스 헌법 제34조에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는데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헌법에 명문화된 셈입니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1975년부터 낙태가 허용되고 있어 이번 개헌을 계기로 실질적으로 바뀌는 조치는 없죠.

그러나 상징성은 큽니다. 연방대법원에 의해 낙태권 판결이 폐기된 미국 등을 제치고 세계에서 최초로 ‘헌법상 낙태할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가 된 겁니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는 여성의 낙태권에 대해 이견을 빚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경우 낙태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까지 심각한 상황이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AP/뉴시스)
개헌 주도한 마크롱, 정치적 위기까지 극복하나…“프랑스의 자부심”

프랑스 양원 합동회의에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면 유효표(852표)의 5분의 3 이상이 찬성해야 합니다. 이날 찬성표는 의결 정족수인 512명보다 훨씬 많았는데요. 극우 진영의 유력 대권 주자인 마린 르펜 의원이 소속된 극우정당 국민연합(RN)과 보수적인 공화당을 포함해 의회에 진출한 프랑스의 주요 정당 중 어느 정당도 낙태 권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죠.

삼권 분립 원칙에 따라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투표 결과 발표 직후 X(옛 트위터)에 “프랑스의 자부심,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평가하며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헌법 국새 날인식을 공개적으로 열어 축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가브리엘 아탈 총리도 “오늘 프랑스는 여성의 몸은 여성의 소유이며 누구도 여성의 몸을 대신 처분할 권리가 없다는 역사적인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냈다”며 “이는 시몬 베이유와 그 길을 닦은 모든 이들의 두 번째 승리”라고 말했습니다. 시몬 베이유는 1975년 프랑스에서 첫 낙태 합법화를 주도한 당시 보건 장관이자 여권 운동가입니다.

프랑스 역사상 처음 여성으로서 양원 합동회의를 주재한 야엘 브룬 피베 하원 의장은 “프랑스에서 낙태는 영원히 권리가 될 것”이라며 “이 강력한 행위를 통해 프랑스는 당파적 분열을 넘어 다시 하나가 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스테판 세주르네 외교부 장관은 프랑스 헌법을 넘어 “유럽 헌장에 이 내용이 명시되길 바란다”는 기대를 드러냈죠.

프랑스의 이번 행보는 2022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약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한 영향이 주효했습니다. 미국과 다르게 낙태권을 헌법에 명시해 되돌릴 수 없는 권리로 만들기로 추진한 겁니다.

2022년 11월 하원에서 낙태할 ‘권리’를 명시한 의원 발의 개헌안을 승인했지만, 3개월 뒤 상원에서 ‘권리’가 ‘자유’로 수정된 안이 통과돼 헌법 개정에는 실패했는데요. 헌법을 개정하려면 양원이 동일 문구의 개헌안을 의결해야 합니다. 이에 마크롱 정부는 결국 직접 개헌을 주도하기로 하고 ‘낙태할 자유 보장’이라는 절충 문구로 개헌안을 발의해 상·하원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죠.

이번 개헌을 주도한 마크롱 대통령에 대해선 정치적 위기를 일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합니다. 최근 그는 “전쟁 3년 차에 접어든 우크라이나에 유럽 등 서방 동맹국이 직접 파병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발언으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처지에 놓였는데요. 미국, 독일 등 주요 동맹국들은 이 발언에 일제히 선을 그었고, 프랑스에서도 “무리수”라는 비판이 쏟아진 바 있죠. 그러나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성사된 개헌을 기회로, 다른 선진국들에 앞서 여성 인권 향상을 주도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AP/뉴시스)
미국의 낙태권, 오랜 ‘정치 양극화’ 이슈…‘냉동 배아’ 태아로 인정 판결 후폭풍도

프랑스는 세계 최초로 헌법에 ‘낙태할 자유’를 명시했지만, 미국에서는 냉동 배아(수정란)를 ‘태아’로 인정한 판결이 나온 뒤 후폭풍이 거센 상황입니다. 앞서 프랑스 의회도 “많은 국가, 심지어 유럽에서도 여성이 원하는 경우 임신을 중단할 자유를 막으려는 흐름이 있다”면서 미국의 사례를 지적한 바 있죠.

미국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통해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했습니다. 헌법에 명시된 사생활의 권리가 낙태의 권리까지 허용한다는 내용의 판례였는데요. 그전까지는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 때처럼 특별한 경우 외에는 낙태를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판결은 트럼프 행정부 때 보수 우위로 재편된 연방 대법원의 결정으로 2022년 6월 폐기됐습니다. 이후 보수적인 주들은 여성의 낙태권을 제한하기 시작했는데요. 지난달엔 낙태를 금지한 앨라배마주에서 냉동 배아를 사람이라고 인정한 판결까지 나와 논란이 됐습니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냉동 배아도 어린이이며, 이를 폐기할 경우 부당한 사망에 따른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는데요. 문제는 이 판결이 난임 치료의 일종인 체외 인공수정(IVF)까지 어렵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21년 미국 전체 출생아의 약 2%인 9만1906명이 시험관 시술로 태어났습니다. 통상 시험관 시술은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다량의 난자를 몸 밖으로 채취해 시험관 내에서 정자와 수정시킨 후 배아 대부분을 냉동 보관하는데요. 임신에 성공하면 그간 보관했던 배아를 기부하거나 폐기할 때가 많습니다. 앨라배마주의 판결은 이런 행위까지 불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걸 뜻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주에서도 사람의 범주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배아나 태아로까지 확대하는 판결이 나온다면, 미국 전역에서 낙태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는데요. 미국의 여성과 진보 성향 유권자들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침해받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중입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직접 성명을 내고 “여성들이 자기 스스로와 가족을 위해 하는 결정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충격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이것은 ‘로 대 웨이드’ 폐기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직격했습니다.

경제, 이민, 외교, 안보 등 이슈에는 강경 일변도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이 문제에 있어선 한 발짝 물러선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낙태권 문제가 쟁점화된다면 선거판이 민주당에 유리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경험’ 때문으로 풀이되는데요. 실로 2년 전 중간 선거에서는 혼란한 경제 상황과 바이든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로 공화당의 압도적 우위가 점쳐졌지만, 민주당이 낙태 이슈를 선점하면서 젊은 층과 여성의 투표를 끌어내 깜짝 선전했습니다. 이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앨라배마주 대법원의 판결 이후 난임 병원이 문을 닫는 등 혼란이 발생하자 “아이를 가지려는 커플들이 인공수정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강력히 지지한다”며 부랴부랴 지지에 나섰죠.

▲(뉴시스)
한국은 낙태권 논의 ‘잠잠’…입법 공백으로 혼란만 이어져

한국에서는 형법상 낙태죄가 폐지됐습니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인데요. 헌재는 ‘임신 22주’를 낙태 허용의 상한선으로 판단하면서 이듬해 말까지 법 개정을 주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국회가 민감한 문제를 다루기 꺼린 탓일까요? 후속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낙태의 허용 범위와 절차, 건강보험 적용 여부 등 구체적인 요소에 대해선 법으로 일절 정해지지 않은 겁니다. 현재로선 낙태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도, 처벌도 없는 상태입니다. 보건복지부와 식약처는 국회가 임신 중지 관련 법을 통과시킨 후에 건강보험 적용 등의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입장이죠.

그간 국회에는 정부안과 의원안 등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결론을 내진 못했습니다. 일례로 수술 외에 유산유도제 약물 허용 등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모자보건법 개정안 등이 국회에 상정된 바 있지만 진전이 없죠. 2020년 정부안은 임신 14주 이내일 경우 본인 의사에 따라 낙태를 결정할 수 있도록 했고, 이후 15~24주 이내는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상담과 24시간 숙려기간을 거치도록 조건을 달았지만, 이 정부안은 아직도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선 2021년 1월 1일 자로 형법상 낙태죄 규정이 자동 폐지됐지만, 대체 입법은 여전히 답보 상태입니다. 이에 여성계는 물론 아동계, 종교계와 의학계까지 낙태권을 놓고 대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낙태죄가 폐지되기 전 만들어진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선 △부모의 우생학적·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부모의 전염성 질환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임신 △친인척간의 임신 등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했고, 이 경우에만 건강보험이 적용됐습니다. 해당 사안이 여성들의 보건문제와도 직결된 만큼 후속 입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는데요. 프랑스의 역사적인 결정으로 한국에서의 사회적 논의도 탄력받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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