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에세이]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들께

입력 2024-02-25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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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사협회 전라북도의사회와 전북대학교, 원광대학교 의대생들이 22일 전북 전주시 전주종합경기장 앞 도로에서 '의대정원증원 필수의료패키지 저지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고 입을 모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10년 전 뒷목 통증이 유난히 심했던 때가 있습니다. 집 근처 정형외과 의원에 방문하니 도수치료를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받았습니다. 그 시기 실손의료보험을 갈아탔는데, 기존에 도수치료를 받았던 이력이 문제가 돼 보장 범위에서 경추질환이 빠졌습니다. 의원에 사정을 설명하니 진단코드를 바꾸면 된다고 했습니다. 안 그래도 도수치료 효과를 못 보고 있었는데, 의사가 진단코드까지 바꿔가며 계속 도수치료를 권하니 불신이 생기더라고요. 이후 의료기관을 십수 번 옮겨 다녔는데,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기·승·전·도수치료였죠.

그러다 방문한 한의원에서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제 얼굴과 입 안을 자세히 보더니 치과로 가라고 했습니다. 부정교합으로 한쪽 목 근육이 발달해 신경을 압박하는 게 통증의 원인인 것 같다면서요. 그 말에 치아를 교정했고, 이후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기존에 만났던 의사들은 이런 문제를 몰랐건 것일까요, 아니면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요.

정형외과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어릴 때부터 피부가 건조해 종종 태선 같은 피부질환이 생기는데, 피부과 의원에서 ‘만족할 만한’ 진료를 받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피부과에서 미용시술 환자만 우대한단 건 오래된 얘기죠. 저도 몇 번이나 겪어보니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체감됐습니다. 최근엔 대놓고 ‘미용시술만’ 하는 의료기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세종시만 봐도 그래요. 접수·수납창구에선 50만 원, 100만 원 단위로 정액 이용권을 판매하고요.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들, 요즘 정부가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 혼합진료 금지 등이 담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추진하는 데 불만이 많죠? 그런데요, 그거 다 여러분 때문에 나온 대책이에요. 모든 환자가 제때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면, 필수의료가 잘 유지되고 있다면, 필요한 만큼 의대 정원이 미리 확충됐다면 이런 일 없겠죠. 저도 알아요. 훌륭한 의사 선생님도 많다는 걸요. 하지만, 모두가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아닌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 결과가 진료과목 정형·성형·피부 쏠림과 지방·필수의료 붕괴일 것이고요. 지난해 제 딸이 머리를 다쳤을 때 집 근처 대학병원에서 수용을 거부해 딸을 안고 2시간 가까이 병원을 찾아 헤맸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끓어요.

이렇게 의료체계가 무너지는 동안 대한의사협회(의협)로 대표되는 의료계는 뭘 했나요? 그저 수가 인상만 요구해왔죠? 특히 가파른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 의약분업 총파업으로 의대 정원을 줄였고요. 이후 축소된 정원을 복원한다고 하면 또 파업으로 협박하고요.

전공의, 의대생은 죄가 없어요. 선배들이 의료체계를 잘 유지했다면, 그리고 점진적으로 의대 정원을 늘려왔다면, 이렇게 일시에 대규모로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할 일은 없었을 거예요. 또 혼합진료 금지, 미용시술 자격 개편을 추진해야 할 일도 없었을 거고요. 여러분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으로, 여러분의 후배들만 박탈감을 떠안게 생겼어요.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건 후배들에 대한 진솔한 사과가 아닐까 싶어요. 반에서 20~30등 하는 학생이 의대에 간다든가, 의학교육 질이 악화한다든가 하는 가짜뉴스 유포가 아니라요. 무엇보다 전공의·의대생들이 집단행동으로 의사 면허를 잃거나 학교에서 제적되면 여러분이 책임질 거 아니잖아요. 자존심 때문에 사과를 못 하겠다면, 선동만이라도 말아주세요. 여러분이 계속 그러면 ‘진짜 존경받아야 할’ 의사 선생님들까지 욕먹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 건강·생명을 지키려 노력하는 분들까지 비난받는 게 속상해요.

마지막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 정책이 잘못됐다’고 판단하신다면, 집단행동도 여러분이 하세요. 그 책임도 여러분이 지고요. 전공의·의대생들 앞세우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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