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기업’ 연명에 수조원 혈세…커지는 ‘경제 악성 종양’ [2024구조조정의 시간]

입력 2024-01-1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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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경제 갉아먹는 좀비기업

작년 상반기 기업 이자보상배율
전년동기比 ‘반의 반토막’ 1.2배
전기ㆍ전자업종 1.9배→-5.9배
中企 취약기업 비중 58.9% 달해
“재산매각 등 자구노력 유도해야”

부실기업을 제때 정리하지 못해 오랜 기간 수조 원의 혈세를 쏟아부은 사례는 적지 않다.

성동조선은 2000년대 초 조선업 호황기를 거치면서 세계 8대 조선소로 성장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키코(KIKO)’ 사태로 인한 파생상품 거래 손실로 자금난에 빠졌다. 조선업의 장기 침체 여파와 함께 신규 수주 부진으로 비극의 길을 걷게 됐다.

채권단은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신규 자금, 출자 전환 등 4조2000억 원을 성동조선에 지원했으나, 경영은 정상화되지 못했다. 2009년부터 2018년까지 누적 영업손실은 1조 원을 넘어섰다. 선수금환급보증(RG) 등을 포함하면 채권단이 성동조선에 지원한 자금은 10조 원에 육박한다. 성동조선은 결국 2018년 4월 기업 회생 절차에 들어갔고, 3차례 매각 실패를 겪으면서 청산 위기에 직면했다가 극적으로 인수합병이 성사됐다.

성동조선은 오랜 고통 끝에 경영 정상화의 길로 올라섰지만, 더 빠른 결단이 필요했다는 평도 적지 않다.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엮이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적기에 하지 못하는 등 아쉬움도 남겼다.

2000년 이후 주인 없는 회사로 험난한 여정을 겪은 대우조선해양도 수차례 매각 기회를 놓치면서 막대한 공적자금만 투입됐다. 대우조선해양에 들어간 공적자금은 10조 원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저가 수주로 출혈 경쟁을 주도하면서 한국 조선업의 암흑기를 불렀다는 비판을 받는다. 비정상적인 경영이 이뤄지던 당시 잠수함 설계도면이 유출된 정황이 최근 드러나기도 했다.

금호타이어, 쌍용자동차 등도 타이밍을 놓쳐 한국경제에 장기간 아픔을 남긴 사례로 꼽힌다. 마찬가지로 수조 원의 공적자금으로 연명하다 여러 번 매각 시도 끝에 가까스로 경영 정상화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 경제는 같은 실패를 반복할 위기에 처했다. 세계적인 경기 부진과 함께 고금리, 고유가, 고물가 등의 여파로 갈림길에 섰다. 기업의 이자보상배율은 지난해 상반기 1.2배로 전년(5.1배) 대비 큰 폭으로 하락했다. 한국은행의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대기업은 5.4배에서 1.2배로, 중소기업은 2배에서 0.2배로 악화했다. 주력 업종의 업황 부진과 금리 상승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됐다.

영업이익을 총이자비용으로 나눈 이자보상배율은 기업의 이자지급능력을 나타내며, 1 미만으로 떨어지면 기업이 거둔 이익보다 내야 할 이자가 더 많아 정상적인 기업 경영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기·전자 업종의 이자보상배율 하락 폭이 컸다. 2022년에는 19배에 달했으나 지난해 상반기 마이너스 5.9배로 돈을 벌기는커녕 손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가스, 조선 등 업종은 소폭 개선됐지만, 여전히 손실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자보상배율이 1을 넘지 못하는 취약기업 비중은 지난해 상반기 44.8%로 치솟았다. 특히 중소기업의 취약기업 비중은 58.9%로 절반 이상 기업이 한계에 봉착할 위험이 커졌다. 이러한 흐름이 장기화하면 수많은 좀비기업이 양산될 수 있다는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기업들이 차환 리스크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온다.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자금 흐름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을 구제하는 정책이 절실하다. 그러나 사업 지속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자산 매각 등 자구노력을 통한 구조조정 유도 등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세경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정책컨설팅센터장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통화 유동성 축소를 위한 고금리 정책과 경기둔화 영향으로 중소기업 등의 부채 규모가 급격히 증가했다”며 “부실을 억제하면서 만성적 한계 중소기업의 퇴출을 유도하는 디레버리징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대마불사’로 여겨지는 대기업에 대해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저성장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정리 타이밍을 놓치면 더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될 수 있다. 건설업뿐 아니라 시가 총액 2조 원 넘는 기업(시총 순위 150위권) 중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롯데케미칼, 넷마블, 이마트 등이 이자보상배율 1 미만으로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기업으로 꼽힌다.

위기에 몰린 기업이 정상화할 수 있는 워크아웃의 근거가 되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은 지난해 극적으로 연장됐다. 지난해 11월 15일 5년의 일몰 기한이 도래해 효력이 상실되는 사태가 발생했으나, 지난달 8일 난항 끝에 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으면서 2026년까지 3년 연장됐다. 안정적인 구조조정을 위해 일몰과 제정을 반복하는 현 상황에서 벗어나 상시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해서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자율구조조정지원제도(ARS) 등의 활용도가 높아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ARS는 법원이 회생절차에서 개시 여부 결정을 늦추고, 법원의 포괄적 금지명령, 보전처분 등을 통해 채무자와 채권자가 협의를 거쳐 구조조정 등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채무자가 회생절차 개시신청의 이점을 활용하면서 구조조정을 시도할 기회를 주고, 실패하는 경우 회생절차로 이행되는 프로그램”이라며 “쌍용자동차 등 사례에서 유용하게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정책자금을 기반으로 민간자금을 유치해 구조조정 기업에 투자하는 정책펀드의 실효성 제고도 필요하다. 정부는 내년 기업 구조조정 자금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구조혁신펀드’ 5호를 1조 원 규모로 조성할 계획이다. 업계는 기업구조혁신펀드가 다른 펀드와 달리 어렵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기업에 투자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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