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안보’보다 자국 ‘실질 이익’ 우선
美의회, 우크라 지원 예산 대립 격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세 번째 겨울을 맞는 가운데 우크라이나를 향했던 서방의 지원이 위축되고 있다.
전쟁 장기화에 따라 피로감이 커지는 한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전쟁까지 불거지면서 서방의 관심과 지원이 가자지구로 양분된 탓이다.
5일(현지시간) AFP통신과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14~15일로 예정된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협상 안건을 제외하라”고 촉구했다.
오르반 총리는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앞으로 보낸 서한을 통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500억 유로(약 71조 원)의 추가예산 배정도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EU 가입은 물론, EU차원의 우크라이나 지원까지 거부한 셈이다.
앞서 EU 집행위원회는 ‘우크라이나의 회원국 가입 협상 개시’를 회원국들에 권고했다. 이에 따라 이번 정상회의에서 논의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헝가리가 집행위원회 권고 직후 “(가입까지) 꽤 오래 걸릴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제시하자 우려가 확산했다.
헝가리는 EU 회원국이면서 동시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회원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적ㆍ역사적으로는 '친러시아' 성향에 가깝다.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를 상대로 한 경제 제재는 물론, 우크라이나 지원에 부정적 견해를 주장해온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헝가리에 배정된 EU 공동기금 지급을 무기한 보류한 EU 집행위와의 협상을 위한 행보”라고 분석했다.
헝가리에 이어 불가리아도 우크라이나 지원 대열에서 이탈했다.
지난달 불가리아 의회는 '우크라이나 장갑차 지원'을 의결했다. 그러나 루멘 라데프 대통령이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유럽 안보 강화’라는 명분보다는 자국의 실질적 이익을 우선하겠다는 뜻이다.
사정은 우크라이나 최대 지원국인 미국도 마찬가지다. 백악관의 ‘지원자금 고갈’ 경고에도 우크라이나 지원예산을 놓고 민주당과 공화당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백악관은 전날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올 연말까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장비를 보낼 재원이 바닥난다”라면서 조속한 예산 처리를 촉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앞서 10월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인도·태평양, 미국 국경 지원 등에 필요한 추가 재원을 패키지로 묶은 1060억 달러(약 142조 원) 규모의 안보 예산을 의회에 처리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으나 여전히 의회에선 답보 상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 상원이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등에 대한 절차 투표를 하루 앞둔 이날 실시한 기밀 브리핑에 화상으로 참여해 예산안 통과를 호소할 예정이었지만, 막판 이를 취소했다.
불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미국 의회 내 극심한 대립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여당과 정부가 협상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브리핑 자리에서 퇴장하기도 했다.
결국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는 매우 다급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서방의 지원이 중단되거나 축소될 경우 반격은커녕 제대로 된 방어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개전 초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일주일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이와 달리 전쟁이 2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배경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원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방의 추가 지원은 물론 지원 규모에 따라 전쟁의 양상이 달라질 것으로 관측된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군사 지원이 끊길 경우 러시아를 상대로 전선에서 제대로 진격하기는커녕 전황이 급속히 악화할 우려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 정치매체 악시오스는 “우크라이나가 미국 의회와 EU, 전쟁터에서 ‘세 가지 교착상태(triple stalemate)’에 빠졌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