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채권쟁이? 엄민섭 하이證 “역동적 거래 만든다…친구 같은 브로커”

입력 2023-11-23 06:54수정 2023-11-2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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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민섭 하이투자증권 채권투자1부 사원(예명 제스티·31)가 대학시절 힙합 공연을 펼치던 모습. (출처=엄민섭 하이투자증권 )

여의도 증권가에서 ‘채권쟁이’하면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보수적이고 차분한 선비 이미지에 따분하고 재미가 없다. 주종은 와인만 마신다. 이들은 금리가 튀어 올라서 시장이 마비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그저 이 혼란이 지나가길 담담히 기다린다. 장이 요동칠 때마다 주식쟁이들은 잠시도 손을 쉬지 못하고 매수·매도 버튼을 바삐 오가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제스티(본명 엄민섭·31). 힙합에 그다지 관심 없는 이들이라면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무언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의 이름 석 자를 무조건 외우면 된다.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현재 여의도 채권시장 MZ세대에서 가장 ‘핫한’ 사람을 알아본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이미지가 강한 여의도 채권시장에도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 채권쟁이들이 등장하며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정체됐던 채권시장을 젊은 역동성과 생명력으로 무장하고 힘차게 누비는 중이다.

지난달 2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엄민섭 하이투자증권 채권투자1부 사원을 만났다. 1992년생인 엄 씨는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2021년 KR투자증권에 입사해 여의도 증권가에 첫발을 디뎠다. 지난해 11월부터 하이투자증권으로 옮겨 채권브로커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새내기 채권쟁이다. 여의도 채권쟁이 사이에서 엄 씨의 이름이 떠오른 것은 그가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출신이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4년간 엄 씨가 무대에 오른 공연 횟수만 200회가 넘는다. 매년 50차례 이상 무대에 섰던 걸 감안하면, 한 주에 한 번씩은 적어도 공연을 펼쳤다.

엄 씨가 채권시장에 발을 들일 당시 주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무대 위에서 래퍼로 자유분방하게 힙합 퍼포먼스를 보이던 엄 씨가 여의도 증권가, 그중에서도 보수적인 채권시장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엄 씨는 "면접 때마다 증권사는 정장만 입고, 틀에 박혀 보수적인 집단인데 적응하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원래부터 사람 만나는 걸 무척 좋아했던 편이라 채권 영업직무 브로커로 다양한 고객들을 만나고 있는 지금 이 일이 즐겁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국내 채권거래는 대부분 브로커(중개인)를 중심으로 약 90%가 장외시장에서 발생한다. 장외시장의 특성상 투자자는 거래하고 싶은 채권 상대자와 매수가격을 찾기가 어렵다. 이에 펀드매니저들은 채권을 거래할 의사가 있는 사람을 일일이 수소문하며, 거래상대방을 찾아야 하는데 이때 채권브로커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관투자자들이 K-Bond(케이본드) 메신저를 통해 브로커에게 주문을 넣으면 브로커가 매매 호가와 거래정보를 조회해 채권을 구해오는 방식이다.

브로커를 통해 대규모 자금을 운용하는 투자주체들은 은행, 증권사 채권 딜러,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 등이 있다. 올해 장외시장에서 거래된 채권의 일평균 거래대금은 약 18조 원, 건수로는 5970건에 육박한다. 한국거래소에 개설된 장내 채권 시장 거래대금이 같은 기간 4조5000억 원대에 불과한 걸 감안하면 장외시장이 5배가량 큰 셈이다. 메신저를 사용해 아는 사람끼리 비공개적으로 거래가 이뤄지다 보니 이들 사이에서는 끈끈한 신뢰가 형성되는 반면, 폐쇄적 관행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엄 씨도 증권사 입사 전까지 채권브로커라는 직업을 전혀 몰랐다. 그는 “힙합과 랩은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취미였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지금이 아니면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래퍼 활동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전문 프로 래퍼가 되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그가 음악을 내려놔야 했던 건 코로나19가 터지면서다. 코로나19 탓에 집합금지 조치가 시행되면서 기존에 예정됐던 공연들이 줄줄이 취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엄 씨는 “힙합 가수로서의 수명을 두고 진로를 가장 고민했던 차에 친구가 채권 중개 세일즈를 추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채권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엄민섭 하이투자증권 채권투자1부 사원(예명 제스티·31)가 하이투자증권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모습. (출처=엄민섭 하이투자증권 )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채권거래에서 기관과 기관 사이를 암암리에 연결짓는 브로커의 역할이 한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한 현재, 엄 씨는 자신의 역할을 경계에 가두지 않고 누구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는 “처음에 '브로커는 주문을 못 받으면 할 일이 없는 거 아닌가’라고만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상당히 역동적인 일이었다. 장외거래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브로커가 좋은 물건을 캐치하는 역량이 매우 중요하고, 이 과정에서 브로커 개개인의 능력을 살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수동적인 직업이 아니라는 점에서 좋았다”고 말했다.

엄 씨는 “고객들은 저희처럼 온종일 호가창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이때 브로커가 호가창을 보다가 기관이 미처 못 봤던 좋은 물건을 먼저 발견하고 ‘이게 좀 싸게 나온 것 같다’는 판단과 함께 역제안해서 제가 먼저 주도해서 거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며 “한 번은 제 기관(고객)께서 시장에서 대부분 매도하고 거래 수요가 없는 종목에 관심을 보이셨다. 기관이 ‘이 가격에 지금 사달라’고 요청했는데, 제가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더 싸게 구해올 수 있다. 한 번만 믿고 맡겨 달라’고 한 뒤 실제로 10bp(1bp=0.01%p) 넘게 싸게 들여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그 기관과 더 오래 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저도 어쨌든 수수료를 받고, 기관도 원래 사려던 것보다 더 싸게 받아올 수 있어서 고맙다는 인사와 칭찬을 많이 받았고 그럴 때 뿌듯함을 느꼈다”며 “채권시장은 움직임이 크지 않고 느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순간 판단력과 순발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매수, 매도 주문이 들어왔을 때 장이 급변하다보면 단 몇 초 차이에도 ‘이 가격에는 못 산다’라고 판단을 내릴 때가 있다”라고 했다.

MZ브로커로 ‘세대교체’와 함께 경험해보지 못한 시장 흐름의 변화도 뚜렷하게 느끼고 있다. 엄 씨는 “시장에서 저도 그렇게 어린 편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어린 친구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얼마 전엔 00년생 브로커도 들어왔다”며 “선배들 말을 들어보면, 요즘처럼 금리 변동성이 높지 않아 장이 좋던 예전에는 사기만 해도 채권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또 윗세대 분들은 고금리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정도 금리면 높다‘라고 고점을 생각하고 처음부터 롱(매수)을 잡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 저희들은 금리가 올라도 일단 숏(매도)을 더 많이 치고 액티브하게 운용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채권시장에서 가장 먼저 개선돼야 할 점으로는 케이본드를 꼽았다. 케이본드는 한국금융투자협회가 운영하는 장외 채권거래 메신저다. 채권 호가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어 ’채권시장의 HTS(홈트레이딩시스템)’로 통할 정도로 채권거래에 필수적이다. 금융투자협회가 마지막으로 케이본드 시스템을 재구축한 것은 지난 2017년이다. 이후 케이본드는 6년간 세부 업그레이드만 진행해왔다. 지난 6월에는 채권 입찰 과정에서 케이본드 메신저 시스템에 일부 오류가 발생하면서 일부 주문이 누락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엄 씨는 “케이본드 서버가 불안정해서 거래 도중에 튕길 때가 많다. 체결하는 순간에 채팅창이 다 꺼져버리면 다시 로그인해서 거래 상대방을 찾아야 한다”며 “튕기고 다시 들어가는 사이에 장이 세지거나 밀려서 가격 변화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답답한 점이 많다”고 토로했다. 이는 엄 씨가 윗세대들과 가장 세대차이를 크게 느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케이본드가 모바일 환경에서 사용이 불가하고, PC로만 가능한 점이 너무 답답한데 윗분들은 적응하신 것 같다. 채권시장이 폐쇄적으로 운영된다는 점도 시스템 개선을 위한 공론화가 더딘 까닭 같다”라고 덧붙였다.

엄 씨의 최종 목표는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브로커가 되는 것이다. 그는 "사실 시장에서 브로커라고 하면 가격 갖고 장난쳐서 중간에 수익을 떼먹는다는 의심도 많다는 걸 잘 안다"며 "그런데 저는 제 고객이라면 '민섭이에게만큼은 믿고 호가를 맡길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브로커가 되고 싶다. 고객과 브로커 사이로 만날지라도, 인간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 같은 브로커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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