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도약계좌 시행 석 달' 10명 중 4명은 계좌개설 안 해…시기 놓쳤거나 저축 여유 없어
“기여금도 준다니까 시작했어요. 다 모으면 어디든 쓸 데가 있겠죠.”
경기도에 거주하는 사회초년생 김 모(25) 씨는 매달 돈을 모아 어디에 쓸 것이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김 씨는 청년도약계좌에 가입했지만, 돈은 부모님이 대신 매달 70만 원씩 넣어주기로 했다. 직장인이 된 지 2년 차밖에 되지 않아 모아둔 돈이 부족하고 한 달에 월세 60만 원, 식비 30만 원씩은 기본으로 꼬박꼬박 나가는 터라 여력이 없어서다.
김 씨는 정부에서 청년만을 대상으로 정부 지원금까지 준다는 얘기에 ‘신청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일단 가입하고 계좌를 개설했다. 하지만 막상 매달 70만 원을 넣으려니 부담이 컸다. 물론 여력이 되지 않을 때는 금액을 줄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정부 기여금 혜택을 못 받는 셈이기에 부모님께 손을 내밀었다. “부모님 돈이라 다 모은 뒤에도 마음대로 쓸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김 씨는 5년 뒤 목돈을 모아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계획도 없다고 말했다. “제가 돈을 넣는 게 아니라서 지금 당장 제 (청년도약)계좌에 얼마 들어있는지도 모르는데 5년 뒤는 아직 아득하죠”
매달 70만 원을 넣으면 5년 뒤 5000만 원의 목돈을 얻게 되는 청년도약계좌가 운영을 개시한 지 약 석 달이 지났다. 그간 6ㆍ7ㆍ8월 세 차례 가입신청을 받아 7월과 8월 계좌를 개설했다. 이달 4일부터 15일까지 8월 신청자 계좌개설 기간을 운영 중이다. 10일 금융위원회와 서민금융진흥원에 따르면 8월까지 청년도약계좌를 개설한 청년은 총 37만8000명이다.
문제는 김 씨와 같이 ‘혜택을 받기 위해’ ‘안 하면 손해’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가입신청부터 하고 돈을 어떻게 모아서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모르는 청년들이다. 서울시 서대문구에 사는 이모(29) 씨 역시 신청하지 않으면 손해일 것 같아 6월에 청년도약계좌 가입을 신청하고 7월에 계좌를 만들었다. 이 씨는 “5년 만기라니 그때까지 잘 넣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됐지만, 일단 가입하는 게 이득이라는 말에 신청했다”며 “아직 두 달밖에 되지 않아서 내 돈으로 70만 원씩 넣고 있지만, 다 모으면 어디에 쓸 거라는 계획은 아직 없다. 그냥 예금으로 묶어두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서민금융진흥원에 따르면 청년도약계좌 가입신청 후 개인ㆍ가구 소득요건을 모두 충족했지만 계좌를 개설하지 않은 청년은 10명 중 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종 가입 가능 안내를 받은 후에도 계좌를 개설하지 않은 청년이 있다는 점은, ‘일단 가입신청부터 하고 보자’는 이들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누적 계좌개설 현황을 살피면 7~8월 두 달 동안 10명 중 4명은 신청 후 가입요건을 충족했지만, 실제 계좌는 만들지 않았다. 총 109만3000명의 신청자 중 61만2000명이 가입 가능 안내를 받았고 이중 61.8%에 달하는 37만8000명이 계좌를 개설했다. 약 38.2%는 가입 가능 안내를 받았음에도 계좌를 개설하지 않았다.
가입 가능 청년 중 계좌를 개설하지 않은 이들의 비율이 7월보다 8월에 늘었다. 6월 신청자 65만3000명에서 가입 가능 안내를 받은 약 39만 명의 청년 중 7월에 실제로 계좌를 만든 청년은 25만3000명으로, 64.9%였다. 7월에는 약 35.1%가 소득요건을 충족했음에도 계좌는 개설하지 않았다.
8월에는 10명 중 4명(43.7%)이 가입 가능 안내를 받았음에도 계좌를 열지 않았다. 7월 가입신청자 44만 명 중 가입 가능 안내를 받은 청년은 총 22만2000명으로, 이들 중 8월에 실제 계좌를 만든 청년은 12만5000명(56.3%)이다.
물론 해당 청년들을 대상으로 조사가 이뤄지거나 발표된 바가 없어 정확한 계좌 미개설 이유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 중에는 계좌개설 시점을 놓쳤거나 매달 일정 금액을 납입할 여력이 되지 않아 계좌 개설을 포기한 청년 등이 포함돼 있다. 돈을 모으는 목적이나 주머니 사정에 대한 충분한 고민 없이 일단 신청부터 한 청년들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청년재단이 20~30대 청년 208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청년 10명 중 3명은 저축할 여유가 없는 상황인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인 중에서도 저축할 여유가 없거나 월 10만~50만 원 정도 저축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44.5%에 달했다.
청년도약계좌에 매달 70만 원을 납입할 여력이 없는 경우 그보다 낮은 금액을 납입해도 되지만, 여력이 없을수록 중도해지 가능성은 커진다. 청년도약계좌와 같은 자산형성 목적의 정책상품 '청년희망적금'의 경우, 10만 원 미만 납입자의 중도해지율이 49.2%로 가장 높았다.
앞서 김 씨와 이 씨처럼 계좌는 개설했어도, 돈을 모으는 목적이 불분명하면 계좌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동력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식비나 대출 이자가 오르는 등의 지출 요인이 생기면 곧바로 계좌 유지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매달 청년도약계좌를 몇 명이 가입신청하는지 등 ‘수요’만 중요한 게 아니라 계좌 개설 이후 유지 관리와 자산 형성 이후 활용 방안에 대한 교육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금융당국은 청년도약계좌 출시 이전부터 한국금융연구원에 용역을 맡겨 청년도약계좌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 등 관련 연구를 진행해왔다.
박준태 연구위원은 지난달 ‘청년자산형성사업의 도약을 위한 제언’ 연구보고서를 발표해 “자산형성사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특별해지요건을 확대해 인정하거나 혹은 가입자가 자발적으로 가입유지를 할 수 있는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장기적으로 여러 자산형성사업 간 관계를 정립하는 동시에 사업의 효과를 평가ㆍ관리할 수 있는 통합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 연구위원은 “청년 중 55.5%가 주거비용 마련을 청년자산형성 사업에 참여하는 주된 목적으로 응답한 만큼, 만기 후 형성한 자산을 청약통장에 납입하면 혜택을 주는 등 주거사업과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축적된 자산을 연금저축 혹은 퇴직연금(IRP) 계좌에 납입하는 경우 추가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등 다른 자산형성사업과 연계를 통해 자산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서민금융진흥원은 8월부터 청년도약계좌 이용자를 대상으로 맞춤형 온라인 교육과정 ‘투자시대’를 개설해 상품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을 진행 중이다. 총 5개 강좌를 통해 계좌 만기 이후 형성된 목돈으로 자산 관리하는 법, 신용과 부채 관리하는 법 등을 알려준다. 상품 가입을 고민하는 청년 역시 미리 살펴볼 수 있다.
앞으로 청년도약계좌의 효과를 평가, 관리하고 계좌를 유지할 방안을 찾기 위한 예산은 충분한 상태다. 금융당국은 내년도 청년도약계좌 사업에 전체 예산의 약 11%에 해당하는 5000억 원을 편성했다. 소상공인ㆍ자영업자 채무조정 프로그램인 ‘새출발기금’ 다음으로 큰 규모다. 올해 청년도약계좌에 신규 편성된 예산 3528억 원보다 41.7% 증액됐다.
늘어난 예산만큼 청년들의 계좌 유지 방안, 자산 활용 방법 교육 등 사후관리에도 금융당국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실효성 있는 방안을 내놓을지 금융권의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