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민연금, ‘석탄채권’ 던져도 위탁사가 샀다…‘엇박자 탈석탄’

입력 2022-10-11 19:33수정 2022-10-1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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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석탄' 국민연금, '석탄채권' 2조5920억 원→2조7720억
직접투자 줄여도 위탁운용사가 사들이는 '엇박자' 투자
강훈식 "기준 있어야 투자 방향이 정확하게 설 것" 지적

▲청소년기후행동, 정치하는엄마들 관계자들이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 서초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전의 베트남 신규 석탄발전소 사업에 반대하고 있다. (뉴시스)

국민연금이 석탄 기업에 대한 투자를 줄이겠다는 ‘탈석탄’을 선언하고도 국내채권 석탄 투자 규모를 늘린 것으로 조사됐다. 석탄발전 매출 비중이 높은 발전공기업의 ‘직접 투자’는 줄였지만, 자산운용사에 맡긴 ‘위탁 투자’가 늘어나면서다. “국민연금이 운용사를 방치했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적자 늪에 허덕이는 발전 공기업을 무시할 수 없다는 현실론이 또 발목을 잡는다.

◇“국내채권 석탄투자, 탈석탄 이후 더 늘었다”
11일 이투데이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확인한 ‘국민연금의 탈석탄 선언 이후 국내채권 투자 현황(직접·위탁)’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탈석탄을 선언한 지난해 5월부터 올해 3월까지 한국전력공사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공기업 5개사의 채권을 2조5920억 원에서 2조7720억 원으로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발전공기업 5개사는 석탄발전 매출 비중이 50%를 웃돌아 통상 ‘석탄 기업’으로 분류된다.

국내 채권 비중을 줄이는 기조 속에서도 1800억 원이 늘었다. 남부발전 채권(700억 원)이 가장 많이 증가했으며 서부발전 500억 원, 남동·동서발전도 각각 400억 원 늘었다. 중부발전만 200억 원 줄었다. 발전소별 채권 총계를 집계해보면, 중부발전(1조1070억 원)의 비중이 가장 컸으며 △남부발전 6200억 원 △서부발전 5750억 원 △남동발전 3700억 원 △동서발전 1000억 원이 뒤를 이었다.

국민연금의 ‘탈석탄’ 노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탈석탄 선언 후 국민연금은 중부발전과 동서발전에서 각각 1500억 원, 100억 원의 직접투자를 줄였다. 발전공기업 직접 투자 규모도 감소세다. 2020년 2조5500억 원에서 2021년 5월(탈석탄 선언) 2조1600억 원 2022년 3월 2조 원으로 꾸준히 줄었다.

위탁투자가 늘어버린 탓이다. 탈석탄 이후 국민연금이 중부·동서발전에 각각 1500억 원, 100억 원 규모로 직접 투자를 줄였으나 위탁운용사는 1300억 원, 500억 원을 담았다. 국민연금은 내부 인력을 통해 ‘직접 투자’할 뿐 아니라 외부 운용사에 수수료를 주고 투자금을 맡기는 ‘위탁 투자’도 운영한다.

국민연금은 삼척석탄발전소를 운영하는 포스파워를 포함해 한화에너지·군장에너지·GS E&R에 직접 투자하지 않지만, 운용사들이 여기에 투자하는 규모만 1510억 원에 달한다. 이처럼 국민연금 ‘탈석탄’ 이행을 위해 투자를 줄여도 운용사가 담아버리면 사실상 ‘도루묵’이 되고 만다.

◇“석탄 기업 경영난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해”

왜 국민연금은 운용사의 석탄 투자를 방치했을까. 국민연금이 유독 국내채권에 소극적인 배경에는 발전 공기업의 경영난 문제가 지목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으로 에너지 원재료 가격이 폭등하면서 발전 자회사들의 경영난도 커지는 상황이다. 이에 시장에선 ‘큰손’인 국민연금이 투자를 줄일 경우 재무 악화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각사가 최근 이사회에 보고한 올해 예산운영계획에 따르면, 남동발전은 2000억 원, 남부발전은 637억 원, 동서발전은 1053억 원, 서부발전은 1223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각각 전망했다. 중부발전만 유일하게 17억 원 당기순이익을 기대했다.

국민연금은 “위탁 투자는 운용사의 투자판단 하에 이뤄진다”는 입장이지만 "운용사를 모니터링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반박이 맞선다. 국민연금이 직접 투자에만 나서지 않을 뿐 운용사를 통한 석탄 투자를 이어가는 방식을 택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발전공기업의 모기업인 한전 투자를 둘러싼 딜레마도 같은 이유다. 한전은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예고한 상태다. 이에 지난 6월 국민연금은 한전 지분 약 2200만 주를 추가 취득하기도 했다. 해외 연기금과 달리 국내 산업·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하다 보니 탈석탄 행보도 '오락가락'하게 됐다.

◇“탈석탄, 기준 늦게 마련할 수록 기업만 혼란”

한편, 국민연금은 지난 4월 ‘석탄 투자제한전략’에 대한 연구 용역을 마쳤음에도 투자 기준을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일각에선 ‘정치적 계산’이 깔렸다는 의심도 제기한다. 이 사이 윤석열 정부의 에너지 기본계획과 에너지 정책 방향이 발표됐으며 이에 따라 국민연금의 ‘탈석탄 정책’에도 담길 가능성이 크다. 최근 공개된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에 살펴보면, 강릉과 삼척의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과 운영이 반영돼 있다.

국민연금은 서면 질의서에 “‘석탄 투자제한전략’ 적용을 위한 단계별 실행방안이 수립될 때까지 직접 투자를 추가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략 내용에 따라 발전공기업 투자도 추가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직접 투자 철회보다는 ‘보류’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올해 말께 투자 제한의 기준이 될 석탄발전 매출 비중을 30%에서 50% 사이에서 결정할 방침이다.

강훈식 의원은 이날 국민연금의 국정감사에서 “(탈석탄 산업 투자 선언 등) 이렇게 안 하면 소위 ‘ESG 라운드’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 우리 국민연금도 세계적 추세에 맞춰 투자하겠다고 선언한 것 아니냐”며 “기준이 있어야 투자 방향이 정확하게 설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강 의원은 국민연금이 위탁운용사 선정, 투자자산 운용, 대체투자 등 각 분야에서 ESG 실천을 위한 노력이 미비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탈석탄 투자 기준에 관한) 연구용역이 끝나고 여러 이해관계자 의견을 듣는 중”이라며 “올해 말 기금운용위원회가 단계적 제한 방안에 대해 논의할 거라고 알고 있다”고 밝혔다. 기금위 안건 상정 계획도 국회에 추후 보고할 계획이다.

▲11일 국회 보건위원회 국정감사(국민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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