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원래 외로워요, 자기가 꿈 가져야죠" '오마주' 신수원 감독

입력 2022-05-1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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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마주'를 연출한 신수원 감독이 1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골목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gusdnr8863@ (이투데이DB)

세 번째 영화도 흥행 실패다. 10년째 꿈을 좇다 보니 어느덧 중년이 된 영화감독 지완(이정은)은 생각이 복잡하다. 변변한 작업실 없이 거실 소파에 엎드리거나 부엌 앞 식탁에 앉아 시나리오를 고치는 일상이 이어진다. 퇴근한 남편(권해효)은 ‘그만큼 영화 일 했으면 너도 네가 좀 벌어서 쓰라’고 구시렁대고, 다 큰 아들(탕준상)은 ‘아직 엄마가 차려준 밥 먹고 싶다’고 마음 약해지는 소릴 한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때쯤 지완에게 고전 흑백영화 ‘여판사(1962)'의 필름을 복원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온다. 작업비는 무척 짜지만, 영화 일과 멀지 않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음 작품을 만들 힘을 비축할 수 있는 꽤 괜찮은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여판사’는 특정 장면이 편집되고 음성도 일부 유실됐다고 한다. 지완은 문득 궁금해진다. 본래 작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취재하던 지완은 ‘여판사’를 연출한 홍은원 감독이 딸 출산을 숨기고 일했다는 걸 알게 되고, ‘여성 감독’으로 살아가는 게 지금보다도 더 녹록지 않았던 1960년대에 분투했을 선배 감독의 궤적에 자꾸 마음이 간다. 홍은원 감독은 이미 고인이 됐다지만, 다행히 당시 함께 일했던 편집기사 옥희(이주실)를 만나 그로부터 과거 ‘여판사’를 상영했다는 폐극장의 존재도 전해 듣는다.

‘여판사’ 복원 작업에 홀린 듯 지방을 전전하다가 잠시 집에 머물던 어느 날, 지완은 아들로부터 건네 들은 말로 크게 주춤한다.

“아빠가 뭐라는 줄 알아, 꿈이 있는 여자랑 살면 외롭대.”

▲'오마주' 스틸컷. 지완의 아들 역을 연기한 탕준상. (트윈플러스파트너스㈜)

16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오마주’를 연출한 신수원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해 물었다. 직접 대사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신 감독은 “인간은 원래 외로워요. 꿈이 있는 남자랑 사는 여자도 외롭죠. 그럼 자기가 꿈을 가지면 돼요. 크든지 소소하든지요”라고 말하며 작품 이야기를 이어갔다.

신 감독도 ‘꿈이 있는 여자’로 살았다. 중학교 국어 선생님을 그만두고 뒤늦게 영화감독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 뒤 첫 장편 ‘레인보우(2010)'를 선보였고, 이후 ‘명왕성(2012)', ‘마돈나(2014)', ‘유리정원(2017)', ‘젊은이의 양지(2019)'까지 2~3년마다 한 편씩 성실하게 작품을 선보이며 대중과 교감했다.

‘명왕성’은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 부문에서 특별언급상을 수상했고, ‘유리정원’은 여성 감독 최초로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되면서 흔치 않은 성과도 거뒀다.

▲영화 '오마주'를 연출한 신수원 감독이 1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gusdnr8863@ (이투데이DB)

그런 신 감독도 ‘오마주’의 정완처럼 거실 소파에서, 부엌 식탁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또 고쳤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때면 카페에 갔다. 그게 “가정 주부이면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했다.

“뭐 해, 얼마나 썼어. 그러면서 남편과 아들이 들여다보죠. 그래서 저는 식탁에서는 일을 잘 못 했어요. 그런 상황을 보여주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주방이 보이는 부엌이 있는 아파트를 골랐어요.”

일에 집중하던 지완이 시어머니에게 걸려 온 전화에 퍼뜩 긴장하며 냉장고부터 정리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현실적이다. 신 감독은 “영화제에서도 그 장면에서 웃고 공감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았다”고 했다.

▲'오마주' 스틸컷. 지완 역을 연기한 이정은.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시어머니가 굉장히 깔끔하신 분이었는데 전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어요. 알다시피 일하는 여자가 시장 가서 장 봐서 냉장고 정리하고 요리하고… 그런 거 잘 못 하죠. 냉장고 속 재료가 그대로 썩게 마련이고, 그런 워킹맘의 일상을 좀 재미있게 그려내고 싶었어요.”

현장에서 영화감독으로 일할 때와 달리, 지완은 집에 들어가면 “고개 숙인 여자이자 며느리로 산다”고 했다. “’바쁘고 힘드니 이것 좀 해달라’며 가족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때로는 빌빌거리는” 건 영화 감독이자 아내, 엄마, 며느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이의 생존 기술처럼 보인다.

신 감독은 그간 여성 삶을 염세적으로 그린 작품을 여러 차례 연출했다. 여성의 가혹한 경험을 다루거나(‘마돈나’), 장애가 있거나(‘유리 정원’), 이혼 후 회사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젊은이의 양지’) 주인공들이 보여준 모습은 대부분 참담했다. 지난 12일 열린 ‘오마주’ 기자간담회에서도 신 감독은 “나는 원래 어둠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 또 염세적인 영화를 찍을 것”이라고 했다.

▲12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오마주' 언론시사회에 참석해 발언 중인 신수원 감독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다만 ‘오마주’의 결은 조금 다르다. 완숙함에 기반한 어떤 낙관처럼 보인다. 초기 작품 ‘레인보우’의 숨결이 모처럼 되살아난 인상이다. 그때의 주인공도 ‘영화 감독 지완(박현영)'이었다. 10여 년이 흘러 ‘오마주’로 다시 등장한 지완의 삶은 여전히 여러모로 수고스럽지만, 그럼에도 자신보다 앞서 같은 꿈을 꿨던 선배들을 발자취를 찾아 나서며 희망을 떠올린다.

그런 까닭에 ‘오마주’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헌사로도 읽힌다. 지금은 쓰지 않는 8mm, 16mm 필름 카메라를 등장시키고, 분절된 필름을 매니큐어로 이어 붙여 35mm 필름 영사기로 구현하는 과거의 작업 방식도 보여준다. 원주에 실존하는 폐극장의 영사기는 일부 부품만 남아있는 까닭에 작동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비용이 더 드는 걸 감수하고도 천안에서 필요한 재료를 공수해 실제 영사 장면을 촬영했다고 했다.

▲'오마주'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엔딩 신은 그렇게 완성한 ‘오마주’의 정서를 함축하는 대목이다. 전기가 끊어지고 천장에 구멍이 뚫린 폐극장 스크린 앞으로 여러 그림자가 어른댈 때, 관객은 이제껏 그곳을 거쳐 갔던 수많은 이들의 흔적을 떠올린다. 신 감독은 “그 장면만큼은 (CG 없이) 사실적으로 담고 싶어 심혈을 기울였다”며 마지막까지 여운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다.

“흐린 날에는 (그림자가 어른대는 모습이) 안 나와서 해가 쨍한 오후 2시에 찍어야 했어요. 극장에서 다른 신을 찍다가도 오후 2시에 해가 떠 있으면 무조건 그 장면부터 찍어야 한다고 스태프들에게 미리 말했죠. 영화 배급팀에도 그 장면이 올라갈 때까지는 조명을 꺼 둔 채로 있어 달라고 했습니다.”

‘오마주’는 26일 개봉한다.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1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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