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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폴 볼커’가 되고 싶지 않은 이창용 한은 총재

입력 2022-05-10 14:00수정 2022-05-1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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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취임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공식 석상이 아닌 사석에서 가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이었던 ‘폴 볼커’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1979~1987년 미 연준 의장을 역임한 폴 볼커는 ‘인플레 파이터’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79년 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면서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은 무려 13.3%로 치솟았다.

1979년 8월에 취임한 폴 볼커는 긴축을 통해 인플레이션과 전쟁한다고 선언했다. 볼커는 앞뒤 안 가리고 인플레이션과 싸웠다. 1979년 10월 6일 기준금리를 11.5%에서 15.5%로 4%포인트나 올렸다. 당시 언론은 이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렀다.

1981년 6월 인플레이션이 14.8%까지 치솟자 폴 볼커는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인플레이션은 진정됐지만, 미국은 긴 경기 침체를 겪었다. 주식과 집값이 폭락했고, 기업들의 파산은 줄을 이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만 수백만 명이었다.

‘폴 볼커가 되고 싶지 않다’라는 건 당장은 폴 볼커처럼 물가와 전쟁을 치러야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통화 완화 정책을 통해 성장률을 안정화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창용 총재는 오는 26일 첫 번째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의장으로 나선다. 폴 볼커가 연준 의장이던 시절의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고물가는 심각한 수준이다. 4월 중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월 수준(4.1%)을 크게 웃도는 4.8%를 기록했다. 2008년 10월(4.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물가뿐만 아니라 미국의 공격적인 긴축, 원ㆍ달러 환율 강세 등 인상 요인이 수두룩하다.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가 아닌 원화 입장에서 기준금리 수준이 미국을 웃돌더라도 차이가 크지 않으면, 이미 하락하고 있는 원화의 가치가 급락하고 외국 투자자금이 빠르게 유출될 수 있다.

특히 환율 상승은 수입 물가를 올리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소비재, 자본재 가격을 상승시키는 요인이다. 이는 생산자 물가를 거쳐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파급된다.

한은의 제1 정책 목표인 ‘물가안정’을 위해 이 총재가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을 것이란 분석이 우세한 이유다. 만약 이번 달 금리를 올린다면, 두 달 연속 인상이다. 2007년 7, 8월 이후 15년간 두 달 연속 금리를 인상한 적은 없었다.

금리 인상은 물가안정에 도움이 되지만, 대신 경기를 위축시킬 수 있다. 미국 경제가 1980년대 초반 침체기를 겪은 것도 미 연준이 금리를 20%까지 올린 이유가 크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작년 말 기준으로 1862조 원에 달한다. 금리를 올리면 가계의 대출 이자 부담이 커진다. 기업들은 자금 조달 비용이 늘어 투자와 고용을 줄이게 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3%였던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달에 2.5%로 낮췄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25일 출입기자단 상견례에서 “매파(통화 긴축 선호)냐 비둘기파냐 물어보는데, 장기적으로는 비둘기파(통화 완화 선호)가 되고 싶다”라며 “생산성을 높여서 고령화 진행 중에도 우리나라 성장률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국민 생활의 질이 올라가도록 노력하고 싶다”고도 했다.

이창용 총재의 임기는 앞으로 4년이다. 임기 초반인 현재, 폴 볼커처럼 '인플레 파이터'로써 물가를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다. 그의 바람대로 향후 우리나라 성장률 확대에도 기여한다면, 역대 그 누구보다 훌륭한 총재로 기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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