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코로나가 바꾼 세계질서’ 자립 경제 체계의 대두...다시 써야 할 글로벌 밸류체인

입력 2021-10-0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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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글로벌 공급망 후퇴 신호탄
G2 이어 EU 자급 추구에 반도체 각자도생 시대 개막
기후변화로 식량 안보도 핵심 이슈 떠올라

한때 지정학적 안정의 원천이었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은 이제 각국의 아킬레스건이 됐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의 칼럼니스트이자 수석 정치논평가인 필립 스티븐스는 최근 주요국들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움직임과 관련해 이 같은 말을 했다.

각국과 주요 기업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만 해도 세계화의 물결 속에 ‘국경 없는 생산라인’을 갖췄고, 이를 통해 구축된 글로벌 공급망의 혜택을 누렸다. 선진국과 대형 다국적 기업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역외에 생산 기지를 세워 비용 효율성을 극대화했고, 이들의 생산기지를 유치한 개발도상국은 풍부한 노동력을 발판 삼아 높은 경제성장률을 누렸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혼란은 복잡하게 얽혀있던 글로벌 공급망에 예상치 못한 충격을 줬고, 이로 인해 그간 보이지 않았던 개별 국가들의 취약성이 여실히 드러나게 됐다.

특히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촉발된 ‘백신 민족주의’는 그간 주요국들이 촘촘히 구축했던 글로벌 공급망 ‘후퇴’의 신호탄이 됐다. 의료 장비와 백신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별 눈치싸움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간 국가 간 상호 신뢰 속에 쌓아왔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은 ‘국가 안보 위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에 주요국 정책 입안자들은 ‘주권’과 ‘안보’를 내세우며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공급망 재정립에 나섰다.

대표적인 분야가 반도체다. 유럽연합(EU)은 9월 자체 반도체 생산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반도체법(European Chips Act)’ 제정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중국과 미국에 이어 독자적인 반도체 제조 생태계 구축을 선언했다. 그간 아시아와 미국의 반도체 업체에 의존했던 구조를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달 15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반도체는) 단순 경쟁을 넘어선, 기술 주권에 관한 문제”라면서 “최첨단 유럽 반도체 생태계를 함께 만들기 위해 연구 투자뿐 아니라 안정적인 공급 체계를 갖춰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1990년대에 40%가 넘었던 글로벌 시장 내 유럽 반도체 생산 비중은 지난해에 9% 밑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부터 코로나19 여파에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하자 미국과 유럽의 경제 축이었던 자동차와 IT 산업에 타격도 커졌다. 컨설팅업체 알릭스파트너스에 따르면 반도체 부족 현상이 장기화하면서 올해 자동차 업계의 매출이 2100억 달러(약 247조 원)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지난 5월 추산했던 손실액 전망(1100억 달러)의 2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업계에선 미국과 중국에 이어 EU까지 반도체 자급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반도체 각자도생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한다. 미국은 지난해 반도체 산업 지원법인 ‘칩스 포 아메리카(CHIPS for America Act)’를 만들었고, 이후 백악관은 4월과 5월에 이어 지난달 23일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위해 화상회의를 소집했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높이겠다고 밝히고 막대한 지원금을 쏟아붓고 있다. 최근에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최측근인 류허 국무원 부총리를 중국 반도체 산업 총괄 사령탑으로 임명해 ‘반도체 굴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시 한번 보였다.

식량도 주요 국가들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자립도 높이기에 주력하는 분야 중 하나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곡창지대가 코로나19에 이어 올해 기후변화로 폭염과 홍수 등 각종 자연재해까지 덮치면서 곡물 수확량이 급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경고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 부족 문제가 앞으로 전 세계적인 고질적 문제가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식량가격지수는 지난 1월(113.3포인트)에서 5월(127.8포인트)까지 5개월 연속 상승했다. 6월과 7월 전월 대비 하락하는 듯했지만 8월 다시 상승세로 전환해 127.4포인트를 기록했다. 특히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96.4포인트였던 곡물가격지수는 지난해부터 가파르게 치솟아 올해 8월 127.1포인트까지 30% 넘게 올랐다.

이에 최근 각국의 식량 안보를 챙기는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국가는 중국이다. 올해 초 중국 당국은 예년과 달리 정책 수립과 관련해 종자 산업 육성 등 식량 안보를 우선순위에 올렸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팬데믹이 식량 공급망에 영향을 미치면서 세계 2위 경제국인 자국의 곡물 공급 자립 강화 수요가 부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중국은 해외시장에서 옥수수 등 곡물 수입도 급격히 늘리고 있다. 미국 농무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9월부터 올해 8월까지인 20·21양곡연도에 중국의 옥수수 수입량은 2600만 톤으로 전년 대비 3.4배나 급증했다. 이는 곡물 비축에 중국이 얼마나 진지한지 보여준다.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 중 한 곳인 러시아도 올해 6월 식품 물가 상승에 대한 조처로 설탕과 밀가루 등 주요 상품 가격 상한선을 도입하고, 농식품 수출을 제한하는 등 식량 안보를 챙기기 시작했다. 한정적 국토 면적과 자원을 가진 싱가포르는 대체육 개발 스타트업 등 푸드테크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며 식량 안보 확보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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