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별세] 스포츠인 이건희…'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으로 꽃피워

입력 2020-10-25 13:57수정 2020-10-2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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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대부고 레슬링부로 스포츠와 인연
강한 투지와 끈기, 끊임없는 도전정신 익혀
2010년 국제올림픽 위원회 위원으로 복귀
세 번째 도전 끝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이건희 회장은 2010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복귀하면서 본격적인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지원에 나섰다. 사진은 2011년 IOC 위원 초청 오찬 당시 이 회장의 모습. (사진제공=삼성전자)

“피영창(Pyung Chang)!”

2011년 7월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을 외쳤다. 어색한 그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이건희 회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국민 염원이기도 했던, 두 차례 실패 끝에 얻어냈던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회장은 "됐구나! 해냈구나! 라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라며 소회를 전했다.

日 유학 이후 서울사대부고에서 레슬링 시작해

선대 이병철 회장부터 이건희 회장까지 삼성가(家)의 ‘스포츠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42년생인 이 회장은 한국전쟁 직후였던 초등학생 무렵, 일본 유학생활에 나섰다.

당시 일본에서 프로 레슬러 역도산의 활약을 봤던 이 회장은 고교 때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사대부고에서 레슬링을 시작했다. 부모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이건희는 이를 통해 강한 투지와 끈기, 도전정신을 익히게 된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돌아온 국가대표 선수단을 격려하는 이건희 레슬링협회장의 모습. (사진제공=삼성전자)

1982년 레슬링협회 회장으로 추대된 이건희 회장은 이후 15년 넘게 협회를 이끌었다. 대규모 투자를 통해 레슬링 발전을 지원하는 한편, 1983년에는 삼성생명 레슬링팀을 창단 '국가대표 사관학교'로 키우기도 했다.

삼성 특검 사건 이후 경영에서 물러난 이 회장은 2009년 12월 특별사면을 통해 경영 일선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IOC 위원으로 복귀하면서 본격적인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지원했다.

이 회장에게 동계올림픽 유치는 단순한 ‘염원’을 넘어, 반드시 이뤄야 하는 ‘의무’나 다름없었다.

열정적인 노력 앞세워 평창올림픽 유치 막후 지원

이 회장은 동계올림픽 개최지 발표 전까지 자신의 모든 일상을 평창올림픽 유치에 쏟아부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유치에 관련된 일이라면 세계 어디든 달려갔다. 장시간 대기는 물론, 개인 일정까지 취소하면서 지지활동을 벌였다. “늦어도 좋다. 기다리겠다”라며 1시 반 넘게 IOC 위원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

▲2010년 삼성전자 경영 전면으로 돌아온 이건희 회장은 동시에 IOC 위원으로 복귀,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해 적극적인 행보에 나섰다. 2010년 IOC 총회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의 모습. (사진제공=삼성전자)
이런 열정을 앞세워 1년 반 동안 총 110명에 달하는 IOC 위원 대부분을 직접 만났다. 휴일에도 하루 일정 모두를 IOC 위원과의 면담에 할애한 적도 있다.

이 같은 이 회장의 노력 끝에 2011년 7월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평창은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됐다.

감동과 환희가 몰려왔으나 기자단 앞에선 이 회장은 겸허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소회를 전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나는 그저 조그만 부분을 담당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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