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5G·바이오·전장부품’으로 미래 먹거리 재편
“다른 글로벌 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투자해서 기회를 선점해야 한다.”
2010년 5월 10일 저녁.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서울 한남동 승지원(영빈관)으로 삼성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불렀다. 이 회장이 경영 복귀를 선언한 지 50여 일 만에 그룹 사장단에 던진 첫 메시지는 신사업을 선점하라는 것이었다.
삼성은 ‘5대 신수종’ 사업으로 태양전지·자동차전지·LED(발광다이오드)·바이오제약·의료기기 등을 선정하고, 2020년까지 23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들 5대 사업 가운데 바이오와 자동차전지는 이재용 부회장 시대에 들어 더 동력을 얻고 있다. 이 부회장은 5대 신수종 사업 발표 8년이 지난 2018년 미래 먹거리로 ‘인공지능(AI)·5G·바이오·전장부품’ 등 4가지 사업을 꼽으며, 2020년까지 4개 신사업에 25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발표한 5대 미래사업에서 태양광을 빼고 반도체로 재편했으며, 의료기기 분야도 제외했다. 자동차전지는 전장부품으로 확대되며 바이오와 함께 신사업으로 재선정됐다.
의약품 생산업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며, 글로벌 최대 위탁생산(CMO) 기업 반열에 올랐다. 매출은 7016억 원으로 전년 대비 30.9% 늘었다. 영업이익은 917억 원으로 전년 대비 64.8% 증가했다.
바이오복제약 개발기업 삼성바이오에피스도 지난해 영업이익 1228억 원을 기록하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2012년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미국 바이오젠과의 합작으로 설립된 지 창사 8년 만에 첫 흑자 달성이다. 2017년에는 복제약인 ‘바이오시밀러’ 넘어 바이오신약 개발에도 나섰다.
자동차전지는 전기차 성장세에 힘입어 승승장구하고 있다. 삼성SDI는 지난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연매출 10조 원을 달성했다. 특히, 지난해 4분기에는 자동차전지가 역대 최대 매출을 달성하며 수익성도 개선됐다. 삼성SDI는 코로나19 여파에도 PHEV(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판매 증가로 2분기 자동차전지의 매출이 유지될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태양전지, LED, 의료기기 사업은 난항을 겪고 있다. 삼성은 소재부터 발전소까지 태양광 사업을 위한 수직 계열화 목표를 세웠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삼성SDI가 2014년 태양전지 사업에서 철수했고, 태양전지 솔라 셀(solar cell) 기판의 원재료인 폴리실리콘을 생산하던 삼성정밀화학은 롯데에 매각됐다.
LED 사업도 난항을 겪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4년 LED 조명 관련 판매, 마케팅 등 해외 사업을 중단했다. 이듬해에는 사업팀으로 조직이 축소됐다. 지난해에는 LED 사업팀 일부 인력을 DS 부문 내 메모리사업부로 전환 배치하며 사업 철수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의료기기 사업은 GE, 필립스, 지멘스 등 기존 업체의 진입장벽을 넘어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삼성은 2012년 메디슨을 인수하며 의료기기 사업에 진출했지만, 2016년까지 적자를 기록했다. 2015년에는 치과용 엑스레이 장비업체 ‘레이’를 매각했고, 2018년에는 인체용 체외진단기기 업체 ‘넥서스’를 매각했다.
삼성은 5대 신수종 사업을 선정한 지 10년을 지나오며, 가장 잘할 수 있고 자신 있는 분야에 더 집중하는 형태로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5대 신수종 사업 중 취약한 LED 사업은 조명 대신 부품 사업에 주력하고 있으며, 의료기기 사업은 삼성메디슨을 통해 영상진단기기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6일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끊임없는 혁신과 기술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신사업에 과감하게 도전하겠다”며 초격차 경영 의지를 내비쳤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발언을 놓고 2016년 9조 원을 들여 인수한 하만(Harman) 이후 대형 인수·합병(M&A)이 나올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삼성전자가 올 1분기 말 기준으로 보유하고 있는 순현금은 97조5300억 원으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업계에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네트워크 등 주력 사업 분야에서의 M&A가 이뤄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글로벌 1위를 달성하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지난해 선포한 점을 미뤄볼 때 이미지센서, AI, AP, 통신용 모뎀 기업 등의 M&A 가능성이 거론된다.
대대적이고 혁식적인 인재 등용 기조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부회장이 “삼성은 앞으로도 성별과 학벌 나아가 국적을 불문하고 훌륭한 인재를 모셔 와야 한다”고 말한 만큼 우수 인재를 미리 선점하는 한편, 코로나19로 얼어붙은 고용시장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이미 코로나19 사태로 미뤄왔던 신입 공채를 지난달 시작했고, 미국에서는 여름 인턴십 프로그램을 취소하지 않고 가상(Virtual) 형식으로 진행하며 새로운 고용 실험을 펼치고 있다.
이건희 회장도 5대 신수종 사업 발표 당시 삼성 계열사 사장들에게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뽑아서 실업 해소에도 더 노력해 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의 회사 가치, 신사업, 인재 등의 발언은 새로운 삼성, 새로운 미래를 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며 “향후 삼성의 움직임이 주목된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