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동차 업계의 전설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지난 25일(현지시간) 별세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6일 보도했다. 향년 82세.
WSJ에 따르면 피에히의 부인 우르슐라는 변호사를 통해 “피에히가 25일 바바리아에서 레스토랑에 갔다가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을 거뒀다”며 “너무나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일”이라고 전했다. 우르슐라는 “피에히의 삶은 자동차와 노동자들에 대한 열정으로 상징된다”며 “그는 마지막까지 열정적인 엔지니어이자 자동차 애호가였다”고 돌아봤다.
포르쉐 창업자이자 독일 국민차 ‘비틀’을 설계한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손자인 피에히는 1937년 4월 1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폭스바겐그룹의 리더십이었을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세계 자동차 산업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1963년 할아버지 포르쉐가 설립한 포르쉐에 입사, 전설적인 스포츠카 ‘포르쉐 917’ 개발을 주도했다. 이 차는 1970년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피에히와 포르쉐 가문은 포르쉐 경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동의에 의해 1975년 폭스바겐그룹에 속해 있던 아우디로 이적한다.
피에히는 아우디로 옮긴 후에도 눈부신 능력을 발휘했다. 기술 엔지니어링 부서의 책임자로 취임해 ‘아우디80’, ‘아우디100’ 등의 모델 개발을 주도했다. 동시에 그룹 B랠리머신으로 유명한 사륜 구동 모델인 ‘아우디 콰트로’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랜딩에서도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BMW와 메르세데스 벤츠 등 라이벌에 필적할 프리미엄 브랜드로 아우디를 개혁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1993년 피에히는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 있던 폭스바겐의 회장에 취임했다. 폭스바겐그룹 산하의 브랜드에서 공통 사용 가능한 모듈구조 기술 개발을 주도하며 회사를 살렸다. 동시에 스코다와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자동차 명가 이미지를 구축했고, 트럭 제조업체 만과 카니아, 오토바이 두카티도 손에 넣었다.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1999년 세계자동차선거재단에 의한 ‘세기의 자동차 기업가(Car Executive of the Century)’에 선정됐고, 2014년에는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폭스바겐그룹과 포르쉐 간 긴밀한 관계 구축에도 노력했다. 피에히는 포르쉐 지분 10%를 소유하고 있었다. 65세에 폭스바겐 회장직을 내놨지만 배출 가스 조작 스캔들 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2015년까지 감사로서 이사회 회장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그는 폭스바겐 최고경영자(CEO)였던 마르틴 빈터코른과 경영권 싸움을 벌이다 결국 축출됐다. 폭스바겐에서 영향력을 잃은 그는 가족들과도 멀어지면서 폭스바겐 지분을 가족들에게 넘기고 가족 사업에서 발을 뺐다. 빈터코른은 그 몇 개월 후 배출 가스 조작 스캔들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제너럴모터스(GM)의 북미 회장과 그룹 부회장을 지낸 밥 루츠는 2016년 WSJ와의 인터뷰에서 피에히를 “화려한 독재자”라고 묘사했다. 애스턴마틴의 앤디 팔머 최고경영자(CEO)는 트위터를 통해 애도의 뜻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