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 평론가, 전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우리 역사에서 가야는 잃어버린 왕국이다. 삼국사기의 신라, 백제본기에 간간이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 온전한 문자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는, 그리하여 희미한 기억 속의 시공이 되었다. 삼국유사의 소략한 ‘가락국기(駕洛國記)’마저 없었다면 그 기억의 공간은 얼마나 더 황량했을 것인가? 사정이 이렇다보니 신화와 허구로 넘쳐나는 일본이나 중국 기록들을 뒤적여 퍼즐을 맞추고 행간을 살펴 그 존재와 실상을 유추해야 하는 것이 가야사의 현실이다. 그렇듯 기록의 부재를 넘어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지지부진하기만 한데, 이제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언급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기록의 부재만큼이나 궁핍한 사정은 유물 쪽도 마찬가지다. 땅 위에 존재했을 유물과 유적은 다 사라졌고, 불교가 성하기 전에 나라가 망해서 그런지 그 흔한 불탑, 불상도 하나 없다. 오로지 무덤에서 발굴되거나 도굴된 부장품이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선진 제철기술의 흔적인 듯 철제 무구(武具)와 장신구도 있지만 대부분이 토기들이다. 그렇게 남은 토기의 도움으로 가야인들의 삶과 신앙, 미술활동이 복원된다면 그 또한 마다할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가야 토기는 특별하다. 백제, 신라에 앞서 질 좋은 경질 토기를 만들었고 그 기술은 일본에 전해져 저들의 스에키(須惠器) 토기 문화를 일으켰다. 항아리와 잔 등 그릇이 중심인 백제, 신라와는 달리 생명력 넘치는 상형(象形)토기가 많은 것도 흥미롭다. 또 제의용으로 만들어졌을 각종 그릇과 기대(器臺)의 조형은 엄정하고 표면에 구현된 곡직(曲直)의 문양이 아름답다. 기술적·미학적으로 그 시대 어느 나라보다 뛰어났으니 진정 가야는 토기의 나라였다.
가야 토기 중에서도 상형토기의 존재감은 더더욱 특별하다. 대개 오리, 사슴 등의 동물 모양을 본따거나 배, 집, 수레 등 지배층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을 본딴 것들인데, 그 속에 원시적 건강함이 녹아 있고, 분출하는 에너지에서는 이승의 풍요와 저승의 영생을 소망하는 옛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읽힌다. 그래서일까, 가야인들의 꿈과 소망을 담은 상형토기의 미감은 원초적이면서 신비롭고 세속적이면서 초월적이다.
최근 그 느낌을 더하는 일군의 유물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라가야의 중심지 경남 함안의 말이산 제45호 고분에서 조형미가 뛰어난 상형토기 넉 점이 완형의 상태로 발굴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슴 모양의 뿔잔은 참으로 매혹적인데, 살짝 뒤돌아보는 사슴의 눈매와 엉덩이를 육감적으로 표현한 조형 감각이 놀랍다. 함께 발굴된 집 모양, 배 모양 토기는 가야의 주거문화나 해양교류와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을지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 토기는 출토지 정보 부재 문제를 극복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도굴된 탓에 지금껏 출토지 미상으로 표기되거나 막연히 가야 것으로 분류되어온 상형토기들의 원류(原流)가 가야, 더 정확히는 아라가야일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종종 유물 한 점이 역사 복원의 단초가 되는 사례를 본다. 그처럼 말이산 45호분 토기들이 잃어버린 가야사 복원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기록자의 입맛에 따라 윤색되기 마련인 문자 기록과는 달리 유물은 시대를 그대로 증언한다. 한 점의 유물에는 수만 자 문자 기록의 허구를 깨트리는 힘이 있다. 그에 힘입어 우리 사회가 한걸음 더 가야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