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LG家 대 이은 독립운동가 지원

입력 2019-02-2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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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하우시스는 2017년 3월, 개보수 공사를 통해 기념관 내부의 노후된 바닥과 출입문을 교체하고 전시관 전체 벽면을 새로 도색했으며, 조명 및 의자도 교체해 쾌적한 관람환경을 갖출 수 있도록 재단장했다. 재개관한 우당 이회영 기념관을 기념관 관계자와 관람객이 살펴보고 있다.(사진제공=LG)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LG가(家) 후손들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해다. 연암(蓮庵) 구인회 LG 창업회장은 중경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1만 원을, 그의 부친 춘강(春崗 ) 구재서 공은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에게 5000원을 지원했다.

구인회 창업회장이 독립자금을 지원한 일화는 태평양 전쟁으로 시국이 좋지 않았던 1942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남 진주에서 ‘구인상회’라는 포목상을 경영하고 있던 구 창업회장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당시 유림 사회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혔던 ‘백산 안희제’ 선생이었다.

근 20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구 창업회장은 쉽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고명한 학자 안효제 교리의 친척동생으로 일찍이 구 창업회장의 조부인 만회(晩悔) 구연호 공과 안효제 교리가 한양에서 같이 지낸 인연으로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안 교리가 만회 공을 만나러 올 때마다 백산 선생 또한 함께 왔었기 때문에 소년기의 구 창업회장과 수차례 만난 일이 있었다.

백산 선생은 과거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상해임시정부를 후원하던 독립 운동계의 거물이었다. 192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업했지만, ‘백산상회’는 당시 국내 최대의 독립운동 비밀자금 루트로 구 창업회장의 사돈이자 GS그룹의 뿌리인 허만정 옹이 설립 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신병 치료차 잠시 귀국했던 백산 선생은 만주로 돌아가기 전,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1만 원을 부탁하고자 구 창업회장을 찾아온 것이다.

1931년 7월에 자본금 2000원으로 ‘구인상회’를 창업한 구 창업회장에게 1만 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당시 80㎏짜리 쌀 한 가마니가 약 20원이었다. 또 당시 일제로부터 지명수배를 받고 있던 이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한 일을 일제가 알게 된다면, 사업 기반은 물론이고 집안까지 풍비박산 날 것을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구 창업회장은 ‘당할 때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태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해 위험을 무릅쓰고 1만 원의 독립 자금을 희사했다.

이런 큰 결심의 배경에는 구 창업회장의 부친인 춘강 공이 1930년께 의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일정 구여순(一丁 具汝淳) 선생을 통해 당시 상해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 일화 5000원을 지원한 일이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백산 선생은 일제 경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1943년에 숨을 거두었지만, 당시 백산 선생이 국내에서 모금해 중경 임시정부에 보낸 자금은 20여만 원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에 큰 힘이 되었다.

LG하우시스는 LG의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2015년부터 현충시설 개보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중경임시정부 청사, 서재필기념관, 매헌 윤봉길 기념관, 우당 이회영 기념관, 안중근의사 기념관, 만해 기념관, 도산 안창호 기념관 등 총 7곳의 독립운동 관련 시설을 개보수했다.

또한, 2016년부터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국가유공자 및 국내외 참전용사 분들의 희생에 작게나마 보답하기 위해 주거환경 개선 활동도 진행해오고 있다. 올해까지 독립유공자(후손 포함) 8명과 국내 참전용사 8명, 해외 참전용사 3명 등 총 19명을 선정해 주거환경 개선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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