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의 명암] 마우스 대신 쥔 연필, PM 6:30 ‘행복’ 그림

입력 2018-08-1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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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칼퇴근 후엔 문화센터로… 초상화 그리며 제2의 꿈 키워

#A전자에 다니는 김 대리. 매주 수요일 퇴근 후에는 집이 아닌 백화점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오후 6시 30분부터 열리는 ‘직장인을 위한 색연필 인물화’ 수업을 듣기 위해서다. 서툰 솜씨로 스케치를 하다 보면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다. 아직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솜씨이지만 열심히 연습해 연말에는 아내에게 초상화를 선물할 계획이다. 한 달여 전만 하더라도 김 대리의 ‘오후 6시 30분’은 상사 눈치 보기에 급급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김 대리의 ‘오후 6시 30분’은 취미생활을 즐기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오후 5시. B통신사에서 일하는 박 사원의 컴퓨터 화면에 업무 마무리를 알리는 팝업 창이 뜬다. 그는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싼 뒤 옷을 챙겨 입는다. 팀 막내이지만 상사 눈치를 볼 일은 없다.

서울 강남에서 7시에 시작하는 폴업 댄스 수업을 들으려면 지금 나서야 한다. 올 초 수강을 신청했지만, 잦은 야근 탓에 아직 열 번도 채 듣지 못했다. 이 실력으로 연말 공연을 잘할 수 있을지 조급하다. 같은 반 사람들 실력은 박 사원이 빠진 사이 일취월장했다. 열심히 연습하면 연말 공연에서 센터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늘도 연습실로 향한다. 박 사원의 머릿속은 이제 ‘일’이 아닌 ‘꿈’으로 채워지고 있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직장인들의 일상에 큰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는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이후 ‘삶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직장인들이 말하는 가장 큰 변화는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이다.

강제 야근과 잦은 회식으로 퇴근 후 쉬거나 잠을 자기에 급급했던 직장인들이 건강을 챙기기 위해 운동을 하는가 하면 취미생활을 위해 문화센터를 찾고, 배움을 위해 학원에 가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은 직장인들의 업무 집중도도 높이고 있다. 한 대기업 직원은 “정시 퇴근을 위해서는 일을 제때 마쳐야 한다. 담배 피우는 시간도 아끼기 위해 흡연량을 줄이며 일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한다.

업무량이 많기로 유명한 한 대기업 R&D팀에서는 ‘주 52시간 근무제의 마법’을 경험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돈다. 이 개발팀 연구원들은 신제품 개발 시즌에는 보통 3개월, 길게는 6개월 동안 거의 매일 야근을 했다. 심한 경우 일주일에 2~3일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이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될 경우 업무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컸으나 막상 제도가 시행된 이후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물론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탓에 현장 곳곳에선 잡음이 흘러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은 대기업 근무자들만의 이야기”라며 오히려 근로자들의 상실감만 키웠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실제 상당수의 대기업과 같이 신규 채용과 교대제 개편 등을 준비할 여력이 없는 중견·중소기업들은 근로시간 단축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연장·휴일근무가 불가능해지면서 소득이 줄어든 근로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 주 52시간 근로제는 장시간 노동체제로 지친 한국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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