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성 구체화하고 실효성 기준도 따져 소비자보호 방안 리스크별 폭넓게 인정
최근 급변하는 금융 환경 속에서 규제는 약이자 독으로 작용한다. 자금 흐름에서 중개 역할을 하는 금융 시스템을 투명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당국의 규제가 필수적이다. 반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흐름 중에 금융 기업들이 과도한 규제로 혁신을 제한받는다면 한국의 금융 산업은 금세 도태될 것이다.
이렇게 금융 규제가 품은 ‘양날의 검’을 모두 잡기 위해 최근 정부와 당국은 ‘규제 샌드박스(regulatory sandbox)’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어린이가 다치지 않고 놀기 위한 모래통처럼 혁신 기업들이 제도적으로 안전한 환경 속에서 마음껏 개발을 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금융에 한정해서 보자면, 규제 샌드박스란 금융업의 인허가를 취득하지 않더라도 한정된 규제 안에서 금융 서비스를 출시, 운영할 수 있도록 당국이 허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 계류 중인 ‘금융혁신지원특별법’… “선진국보다 강력한 보호 방안” =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규제 샌드박스 제도의 안착을 위한 과제’에서 한국에서의 규제 샌드박스 제도 안착을 위해 몇 가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현재 국회에는 ‘금융혁신지원특별법(특별법)’이 계류 중이다. 여기에 포함된 규제 샌드박스 관련 내용을 보면, 우선 금융위는 혁신성과 소비자 편익이 높은 금융 서비스를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하고 제한된 범위 안에서 시장 테스트를 위한 규제 특례를 부여할 수 있다. 다만 테스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비자 피해에 대비하기 위해 핀테크 기업 등 혁신금융사업자에게 무과실 책임을 부과한다. 무과실 책임이란 과실의 유무가 불확실하더라도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을 지우는 원칙이다. 만약 사업자에게 고의·중과실이 있는 경우 피해액의 3배 이내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한다. 사업자가 자체적으로 피해를 보상하기 어려울 경우를 대비해 책임보험 가입도 의무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서 연구위원은 “소비자 피해 가능성에 대비해 이중, 삼중의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며 “이는 영국 등 선진국의 규제 샌드박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강력한 보호 방안”이라고 풀이했다.
또 법안에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혁신금융서비스를 출시하면 최대 1년간 ‘배타적 운영권’을 부여한다는 조항도 있다. 이 외에도 검증된 혁신 서비스를 시장에 안착시키기 위해 테스트 기간을 1회에 한해 최대 2년간 연장하고, 테스트 기간에 인허가 또는 등록에 필요한 요건 일부가 충족될 경우 다음에 인허가 등록을 심사할 때 관련 심사를 간소화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 “혁신성 개념 구체화하고 맞춤형 규제 자문 기능 확대해야” = 서 연구위원은 이 법안을 토대로 규제 샌드박스 제도 안착을 위한 몇 가지 제언을 남겼다. 그는 우선 혁신금융사업자를 선정할 때 ‘혁신성’의 수준을 너무 높게 책정하면 진입장벽을 높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혁신성의 기준을 하부법령이나 가이드라인 등을 통해 구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별법에 따르면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되기 위한 요건 중 하나는 해당 금융 서비스가 종전의 서비스보다 ‘충분히’ 혁신적인가이다. 서 연구위원은 “특정 서비스가 충분히 혁신적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한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규제 샌드박스 제도 자체의 실효성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 선진국의 샌드박스 선정 기준을 더욱 명확히 하고 있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샌드박스에 포함하기 위해서는 해당 서비스가 새롭거나, 새롭게 떠오르는 기술을 사용하거나, 종전의 기술을 혁신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라고 적시하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 신청 사업자는 건전성 규제, 지배구조 관련 규제 등 규제를 점검받는다. 홍콩 증권선물위원회(SFC)도 샌드박스 참여 기업의 조건으로 혁신적인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서 연구위원은 “한국의 규제기관은 인허가와 관련된 재량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기 때문에 제도의 실효성이 더욱 떨어진다”며 “당국은 해외 샌드박스 참여 기업들의 수준과 국내 여건을 감안해 혁신성 수준을 정하고, 하부 법령이나 지침에 이런 기준을 구체화하거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식으로 소통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 연구위원은 또 맞춤형 규제 자문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국의 샌드박스 운영 사례를 보면 샌드박스에 참여하는 시점부터 인허가 단계까지 당국이 기업과 매우 긴밀하게 소통한다”며 “당국은 관련 조직과 인력을 정비해 가이드 기능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경우 금융행위감독청(FCA)에는 샌드박스 대상 기업 전담 직원을 두고, 소비자보호 방안을 사업자와 함께 설계해 나가는 시스템을 갖췄다.
◇ “소비자보호 방안 폭넓게 인정하고 인가 단위 세분화 필요” = 다양한 소비자보호 방안을 허용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서 연구위원은 짚었다. 각 사업자가 금융 서비스에 내재된 리스크에 상응하는 소비자 보호를 하도록 하기 위한 차원이다.
서 연구위원은 특별법에 담긴 ‘무과실 책임’을 부과하고, 책임 보험상품 가입을 의무화하는 내용 등이 획일적으로 제시됐다고 지적했다.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샌드박스에 들어오려는 사업자가 공시, 고객 보호, 보상 방안 등 자신들의 상황에 맞는 소비자보호 방안을 먼저 제시하고, 당국이 이를 승인하는 식의 방식으로 소비자보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서 연구위원은 “한국도 특정 금융 서비스가 혁신성 요건을 충족하면서 소비자 피해와 관련된 잠재 위험이 크지 않다면 자체 소비자보호 방안을 폭넓게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며 “만약 사업자가 샌드박스 테스트 중에 제한된 범위의 영업만 하길 원하고 소비자 피해가 발생해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자본금만 있다면, 당국은 재량껏 샌드박스 테스트를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 연구위원은 마지막으로 인간 단위를 세분화하고 현실화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새로운 사업자가 틈새시장을 신속히 공략할 수 있는 유연한 규제 환경을 조성해 나가기 위한 차원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금융사업 모델이 출현하고 혁신금융사업자가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전의 인가 단위를 고수하는 것은 혁신에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통화감독청(OCC)는 2016년 핀테크 기업이 특수목적 국법은행이 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럽에서도 소위 도전자 은행(challenger banks)들이 여러 형태로 출연하면서 은행 간에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핀테크 기업과 기존 은행 간 협력은 활성화되고 있다.
서 연구위원은 “규정 중심의 한국 금융법 체계에서는 금융사업자를 신속하게 법규에 반영하고, 인가 단위별로 진입 요건을 현실화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며 “종전 인가 단위로 흡수할 수 없는 서비스에 대해서는 규제 샌드박스에 넣어 실험하며 인가 단위를 재정비하는 유연한 프로세스가 필요할 것”이라고 짚었다. 그는 이어 “급변하는 환경에서 규제 샌드박스가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면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당국도 행정의 신속성과 안정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국회와 당국이 지혜를 모아 규제 샌드박스의 애초 취지를 살려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