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EU) 탈퇴(Brexit·브렉시트)를 결정한 지 23일로 1주년을 맞았다. 브렉시트로 결정이 났을 당시의 환희도 잠시. 브렉시트 협상을 둘러싼 혼란을 배경으로 영국 경제의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영국은 서서히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고 있다.
영국 경제는 지난해 브렉시트 결정 후에도 한동안 탄탄한 흐름을 보였다. 파운드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수출이 증가한 덕분이다. 하지만 파운드화 약세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브렉시트 결정 후 파운드는 달러에 대해 16% 이상, 유로에 대해서는 14% 떨어졌는데 그 부작용이 확산하면서 수입 물가가 급등해 경제를 떠받치는 개인소비가 얼어붙고 있다. 5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2.9% 상승했다. 이는 약 4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같은 달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1.2%로 대폭 감소했다. 소비 둔화 여파로 올 1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기 대비 0.2% 증가하는데 그치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올해 성장률도 1%대에 그칠 전망이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 입장에서는 높은 인플레이션율과 경기 침체로 금융정책 결정이 쉽지 않다.
이런 가운데 금융기관이나 제조업 등 기업들은 브렉시트 이후를 내다본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 브렉시트 후에도 기존처럼 영국에서 사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리스본 조약에 따라 영국은 탈퇴 방침을 통보한 지 2년 후인 오는 2019년 3월 30일 EU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된다. 협상은 지난 19일부터 시작됐다. 협상 기한까지 특별 협정을 맺지 않고 EU를 탈퇴하면 관세 등 통상규칙은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에 따를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영국에서의 수출에 관세가 부과돼 영국을 거점으로 제조하는 비용이 높아진다.
이런 사태를 꺼리는 기업들이 투자 축소와 영국 밖으로의 이전을 가속화하면 영국 내 산업 공동화가 심해질 우려가 있다. 영국 자동차 판매 점유율 1위인 미국 포드자동차는 이미 서부 웨일즈 엔진공장을 축소할 계획을 밝혔다. 이렇게 되면 현지 근로자 1100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금융기관들도 단일 면허로 영국에서 EU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가 어려워진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영국에서 이전하는 금융기관이 유로존에서 영업면허를 취득하려면 1년 가까이 걸릴 수 있다며 대응을 서두르라고 당부하고 있다.
브렉시트가 결정된 지 1년 만에 영국 경제가 이처럼 초라한 상황에 내몰릴 줄 누가 알았을까. 미국 경제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 나라의 경제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지에 대해 과소평가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영국은 브렉시트의 영향을 과소평가한 게 치명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작년 6월 영국의 브렉시트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때만 해도 ‘유럽의 병자’는 프랑스였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됐다는 것이다.
이달 치러진 프랑스와 영국의 총선 결과는 이런 대비를 극명히 보여줬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 신당 ‘레퓌블리크 앙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이하 앙마르슈)’는 18일 치러진 총선 결선투표에서 압승을 거뒀다. 앙마르슈와 연정 파트너인 민주운동당(Modem)은 이번 총선에서 총 577석의 하원 의석 중 350석을 얻었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고용과 해고 유연성 확대 등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됐다.
반면 8일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테리사 메이 총리의 집권 보수당은 의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이런 가운데 잇단 악재로 리더십은 점점 추락하고 있다. 지난 3월 런던 의사당 부근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승용차가 보행자를 향해 돌진하는 테러가 있었고, 총선 직전에는 런던 시내 타워브리지에서 승합차 돌진으로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또 지난달 맨체스터의 미국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 공연장에서는 폭탄테러가 벌어져 22명이 희생됐다. 지난 14일에는 런던 서부의 고층 아파트에 인재(人災)에 의한 화재가 발생해 79명이 숨지고 수많은 사람이 실종됐다.
앞으로도 영국 경제에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동안의 강력한 경제 성장은 주로 이민자와 외국인 직접 투자가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브렉시트 결정 이후 모든 게 틀어졌다고 WSJ는 지적했다. 메이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정권은 이민 수용을 향후 5년간 매년 10만 명 미만으로 억제할 방침이다. 반면 브렉시트에 관해서는 EU 단일시장·관세 동맹에서 완전 이탈하는 하드 브렉시트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EU와의 사이에 새로운 무역장벽이 세워져 공급망 혼란이 불가피하다.
WSJ는 브렉시트 결정에 이은 총선이 영국에 새로운 정치적 위험을 낳았다며 브렉시트가 혼란에 빠질 우려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메이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해 정치적 위기가 커지면 제레미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 좌파 정권이 탄생할 수도 있는데, 코빈은 주요 기업의 국유화 및 대기업 증세를 내걸고 있어 노동당 정권 탄생 시 투자 위축은 불을 보듯 뻔하다.
WSJ는 영국이 브렉시트의 파급력을 과소평가했다며 5년 후에는 프랑스가 유럽의 새로운 대국이 될 가능성이 큰 반면 영국은 유럽의 새로운 병자 신세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