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 투자 확대 카드 만지작...트럼프 업고 도시바 인수전 판세 뒤집을 지 주목
한·미·일 연합에 밀려 도시바 반도체 사업 인수전의 우선 협상대상자에서 탈락한 대만 혼하이정밀공업 궈타이밍 회장이 설욕전을 예고했다. 대규모 대미(對美) 투자 카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움직일 기세다.
궈 회장은 22일(현지시간)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도시바의 반도체 메모리 사업 인수 협상에 대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기회는 있다”고 말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보도했다.
도시바는 전날 열린 이사회에서 일본산업혁신기구와 일본정책투자은행, 미국 투자펀드 베인캐피털, 한국 SK하이닉스로 구성된 한·미·일 컨소시엄을 ‘도시바메모리’ 매각의 우선 협상대상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한·미·일 컨소시엄 외에 미국 브로드컴과 혼하이 진영 등이 도시바 반도체 사업 인수전에 참여했으나 일본은 도시바가 보유한 핵심 반도체 기술의 해외 유출과 매각 후 인력 구조조정 우려 등을 감안해 의외의 진영을 선택한 것이다.
혼하이는 애플과 델 등 미국 쟁쟁한 기업들까지 끌어들여 도시바 반도체 매각 입찰에 참여했고, 응찰기업 중 인수가도 최고액을 써냈지만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을 우려한 일본 측의 반대로 우선 협상대상자 선정에서 탈락했다. 궈 회장의 오른팔인 다이정우 샤프 사장은 일본 정부가 혼하이를 협상에서 아예 배제한 데 대해 “갈라파고스적”이라고 비판했다.
혼하이가 미련을 버리지 않은 건 미국 웨스턴디지털(WD)과 도시바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아 최종 결정이 유동적이라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혼하이는 내달 14일 있을 미국 법원 판결에서 법원이 WD의 손을 들어주길 내심 바라는 눈치다. WD는 일본 미에 현의 욧카이치공장을 도시바와 합작 운영해왔다. 그러던 중 도시바가 경영난으로 반도체 사업을 분사해 매각한다고 하자 국제상공회의소(ICC) 산하 국제중재재판소에 중재 요청을 하고, 지난 15일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고등법원에도 도시바 반도체 사업 매각중단 명령을 요청했다. 미국 법원에서 ‘매각 중지’ 결정이 나오면 협상은 한 순간에 백지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가운데 혼하이가 공교롭게도 22일 주총에서 미국 6개 주에서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것도 의미심장하다. 궈 회장은 이날 주총에서 “미국 6개 주에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상은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일리노이, 텍사스 등 6개주다. 이 가운데 3개 주에 대해서는 7월 말에서 8월 중 투자 안이 결정될 것이란 전망도 나타냈다.
혼하이와 산하 샤프가 미국에서 중소형과 대형 패널공장 건설을 검토해오긴 했지만 확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날 궈 회장은 공급망도 구축할 것이라며 미국 투자를 확대할 뜻을 분명히 했다. 궈 회장은 “인도에서 투자를 고려하고 있지만 지금은 미국이 우선이다”라며 “미국에서 투자 환경을 정비하고 산업을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열정을 느꼈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언급했다.
이는 궈 회장이 트럼프를 움직여 내달 중순 있을 법원의 판결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궈 회장은 도시바 반도체 매각 1차 입찰이 끝나고, 지난 4월 말 미국 워싱턴을 직접 방문해 이틀이나 백악관을 방문했고,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과 만남을 가졌다. 당시 회동에서 미국 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시점에서는 대미 투자 여부나 규모를 확정하지 않았으나 도시바 반도체 매각 우선 협상대상자가 발표되자 이를 뒤집을 묘수로 트럼프 대통령을 떠올린 것으로 보인다.
도시바는 이달 28일 정기 주주총회 전까지는 한미일 컨소시엄과 정식 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하지만 WD의 반발이 잦아들 기미가 없는데다 내달 중순에 있을 미국 법원의 결정에 따라선 도시바메모리 매각이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궈 회장의 반격이 승산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