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표·도지사 ‘변방 독고다이’ 별명…보수 구심점에 섰지만 ‘성완종’ 핸디캡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1월 20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만난 홍준표 당시 경남지사는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는 짧은 한 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침묵했다. ‘성완종 리스트’ 2심 현장검증 자리였다.
하지만 70일 뒤 다시 만난 홍 지사는 원내 제2당인 자유한국당의 대통령선거 후보자가 돼 있었다. 특유의 화법으로 강력한 우파 지도자가 될 것을 선언하는‘대선후보 홍준표’의 모습은 두 달 전만 하더라도 떠올리기 힘들었다. 극단을 오가는 그의 정치인생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항상 감시·도청 당한다는 생각으로 35년간 공직생활”= 홍 후보는 1954년 12월 5일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대구 영남중·고교를 나와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청주지검에서 초임 검사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35년간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 전기환을 구속시킨 노량진 강탈사건을 수사했다. 1993년에는 ‘슬롯머신 사건’을 진두지휘한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과 현역 국회의원, 고등검사장, 경찰청장 등 40여명을 수사·구속시켜, 당시‘모래시계’검사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홍 후보는 이 사건 이후 한직을 전전하다 1995년 결국 검사복을 벗었다. 1996년 1월 홍 후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총선에 출마해 서울 송파갑에서 당선돼 금배지를 달았다.
1999년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이명박 전 대통령과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미국에서 만나 연을 맺는다. 2001년 귀국해 서울 동대문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정치권에 복귀한다. 17·18대 의원을 내리 지내면서 2008년 한나라당 원내대표, 2011년 당 대표를 역임한다. 2012년 낙선한 뒤 그 해 경남지사에 당선돼 재선에 성공한다.
◇“정상적으로 (재판) 했으면 친박들이 주도하는 정권 하에서 감옥 갔을 것”
홍 후보는 5일 한 조찬간담회에서 본인의 ‘성완종 리스트’ 연루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그의 정치는 본인의 자서전 제목처럼‘변방’의 정치다.
홍 후보는 계파가 없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2월 16일 2심 무죄 판결 직후 “정당사상 계파 없이 독고다이(혼자 움직이는 사람의 일본식 표현)로 당 대표한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정도로 ‘무(無)계파’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11년 당 대표에 당선된지 5개월 만에 물러난 것도 지지세가 약했기 때문이다.
현재 홍 후보 캠프는 주로 경남도청 서울본부가 중심이 돼 관리하고 있다. 현역 국회의원 중에서는 경상남도 행정부지사를 지낸 자유한국당 윤한홍 의원이 측근으로 손꼽힌다. 같은 당 이주영 의원과 바른정당 주호영 당 대표권한 대행도 긴밀한 관계다. 이 의원은 홍 후보의 개명(판표→준표)을 권유하기도 했다. 주 권한대행은 홍 후보가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 원내수석부대표를 지냈다.
이렇듯 홍 후보는 초임 검사시절부터 대선후보가 될 때까지 변방과 중심을 오가는 ‘롤러코스터’ 인생을 겪었다. 그의 행보와 화법은 그의 정치 인생을 닮았다. 뚝심으로 평가 받기도 하고 무례함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를 향해선 “대구·경북은 살인범은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 안 한다”고 맹비난했다. 그런가하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는 “지금 여론조사 1위하는 사람은 자기 대장이 뇌물 먹고 자살한 사람”이라고 말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 후보를 싸잡아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