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 역에서 일어난 폭발 테러로 푸틴 정권을 둘러싼 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가뜩이나 공직자 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시위로 전국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여러 명의 사상자를 낸 테러까지 겹치면서 유럽 패권국으로 부상하려는 푸틴의 야심에도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한편에선 대 테러를 명분으로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과의 친밀한 관계가 노골화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4일(현지시간) 주요 외신에 따르면 전날 오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 객차 안에서 폭발물 테러가 일어나 이날 오전까지 11명이 사망했다. 폭발은 3일 오후 2시 20분쯤 센나야 플로샤디 역에서 테흐놀로기체스키 인스티투트 역으로 가는 지하철이 터널을 통과할 때 일어났다. 해당 역은 즉시 폐쇄됐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전체 지하철도 운행이 중단됐다.
이날 폭발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로 루카셴코 대통령과 회담을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가운데 일어나 충격을 더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테러를 포함해 모든 가능성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며 당국이 원인을 찾고자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폭발물이 터진 테흐놀로기체스키 인스티투트 역을 찾아 붉은 꽃다발을 놓으며 애도를 표했다.
현재 당국은 용의자를 2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중 한 명은 중앙아시아 출신의 23살 남성으로 알려졌다. 그는 러시아에서 금지된 이슬람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와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정부는 테러 대응을 위해 통제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서 이슬람권 출신이 많은 남부 체첸과 다게스탄에서 치안기관을 겨냥한 테러가 자주 발생하긴 했지만 2013년을 끝으로 주요 도시에서는 테러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와 벨기에 브뤼셀 등 유럽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의한 테러가 잇따르는 가운데 치안당국이 테러 대응을 강화한 결과다.
그러나 러시아도 IS 같은 과격 이슬람 조직의 테러 위협에서 자유롭진 않다. 푸틴 정권은 2015년에 내전이 계속되는 시리아에 군사 개입을 해 독재자 바샤르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테러 대응을 명분으로 한 공습으로 많은 시민이 희생되자 러시아에 대한 반발도 거세졌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상트 페테르부르크 폭발이 러시아 내정에 미치는 영향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지난달 26일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80개 이상의 도시에서 푸틴 정권의 부패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 여기에 가담한 주동자 등 1000명 이상이 체포되는 등 정국이 혼란에 빠진 상태다. 푸틴 정권은 과거에도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단결을 호소하며 자국 내 통제를 강화, 중앙집권화를 추진해왔다.
외교면에서 미국 유럽과의 대 테러 공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 정권은 시리아에 대한 군사 개입과 동시에 미국과 유럽에 IS 소탕을 둘러싼 협력을 호소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IS를 위협으로 꼽고 있으며, 러시아와의 협력을 언급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IS에 의한 테러로 확인되면 푸틴 정권은 미국과 러시아 관계 개선을 겨냥한 테러 외교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