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중립’·‘윤리경영’ 제도적 장치 강화 환골탈태 나서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 광장. 곳곳엔 ‘정권과 결탁한 재벌 총수를 구속하라’는 섬뜩한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상당수는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의 재벌구속특위가 주도해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오가는 시민들의 표정에서 이를 부정하는 낯빛은 극히 드물었다. 이날 2월의 마지막 주말답게 포근한 날씨를 보였지만, 우리 사회의 재벌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칼바람과 맹추위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려 뭉칫돈을 전달한 재계가 ‘민심(民心)’이라는 혹독한 심판대에 올랐다. 기업마다 박영수 특검팀보다 무서운 반기업 정서 기류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탄핵정국과 맞물린 대선 주자들의 재벌개혁 외침, 거대 야당의 대기업 경영을 옥죄는 규제법안 등 반기업 정서 기류는 브레이크 없이 달려나가고 있다.
재계 한 고위 관계자는 “국민들이 정경유착이 작금의 경제를 실패로 이끌었다는 논리에 수긍하고 있다”면서 “자국민의 마음도 얻지 못한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어떠한 이미지로 신뢰를 쌓을 수 있을지,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반시민들의 시선은 특검의 칼날보다 차갑고 날카로운 것 아니겠냐. 정경유착의 흑역사가 다시 회자되지 않으려면, 기업들이 뼈를 깎는 자구노력으로 반기업 정서를 친기업 정서로 바꿔야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계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반기업 정서 고조가 더 강한 규제로 이어지면서 한국 경제의 복병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모두 재벌 개혁을 기치로 내걸며 이목 끌기 경쟁에 나설 경우, 기업 죽이기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재계가 탈정치를 선언하며 쇄신안 마련에 집중하는 이유다. 자칫 반기업 정서를 방치할 경우, 경영 쇄신은 물론 존립마저 위협할 수 있다는 통렬한 자기 반성이다.
양대 경제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가 정경유착의 오랜 관행을 잘라내기 위해 투명성을 전제로 한 정치권과의 거리두기에 나섰다. 전경련은 정경유착 재발 방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어버이연합 지원 등으로 논란이 된 사회협력 예산을 폐지했다. 대한상의는 불법 정치자금 등 정경유착의 고리를 스스로 끊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검은 커넥션으로 촉발된 초유의 스캔들 속에서 추락한 이미지 회복을 위해 비상연임 체제와 정치적 중립과 윤리경영 결의 등 발빠른 움직이다.
기업들도 정치권의 검은 손이 뻗칠 수 없도록 내부 통제장치 강화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삼성과 SK그룹은 10억 원 이상 기부금 내역을 모두 공개키로 했다. 또 집행 시 이사회의 의결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투명경영 쇄신안을 내놓았다. 그간 삼성전자의 경우 기부금에 한해, 자기자본의 0.5%(약 6800억 원·특수관계인은 50억 원 이상) 이상인 경우에만 이사회에서 결정했다.
이는 재계 전반에 빠르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LG를 비롯해 롯데, 한화 등 대부분의 그룹들은 경영진 전결로 기부금을 처리해 왔다. 현대자동차그룹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기부금과 후원금 출연 시 기준과 절차 관련해서 투명성이 우선시 되는 방향으로 여러 가지 방안을 놓고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