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사에 말 걸다] ‘밀정’, 그 시대에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입력 2016-09-2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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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작가

가정을 해본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 아마도 세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제에 맞서 싸웠거나, 협력했거나 아니면 그도저도 아닌 내 목숨 하나 건사하는 것을 다행으로 알면서 평범하게 살았거나.

독립투사들의 삶을 책이나 영상을 통해 짐작해 보건대, 손톱을 뽑는 고문을 버틴다거나 부모와 처자식을 버리며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바치면서 살아갈 자신이 있을 것 같진 않다.

피 끓는 젊은 시절엔 독립군 관련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비분강개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극에 몰입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저렇게 죽으면 억울하지 않을까? 남아 있는 처자식은 어찌 살까? 과연 저런 죽음을 후손들은 제대로 인정해 줄까? 하는 현실적 고민 말이다.

그렇다. 그만큼 당시의 독립운동은 목숨과 함께 자신의 모든 가치들을 송두리째 바치는 행위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선 민중은 일본이 싫고 압제가 지긋지긋했지만 하루하루 그냥 버티고 살았다. 그래서 독립운동은 역시 용기 있는 소수의 몫이었다.

‘암살’에 이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밀정’이 흥행 호조를 보이고 있다. ‘밀정’은 송강호, 공유, 한지민이라는 특급 캐스팅에 스타일리스트로 알려진 김지운 감독의 연출로 개봉 전부터 이미 기대를 많이 한 작품이다. 유독 역사물 풍년이었던 올 하반기 충무로에 마무리 홈런 한 방을 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영화 ‘밀정’의 김 감독은 영리하게도 김원봉이나 의열단 같은 드라마틱한 인물과 소재를 정면으로 다루는 대신 친일과 항일 사이에 고뇌하던 조선인 친일경찰 이정출이라는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그리고 스파이 영화 장르에 잘 녹여 냈다.

‘밀정’은 지금 인터넷 논객 사이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극영화를 평가할 때 항상 고민하는 문제는 바로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무엇을 허구로 볼 것인가이다. 영화 시작이나 끝 자막에 ‘역사적 내용을 소재로 하되 줄거리와 인물은 허구이며 사실과 다름을 밝힙니다’라고 이미 빠져 나갈 구멍을 제작자는 만들어 놓는다.

어떤 평론가는 사극영화에서 사실과 허구를 가르는 건 의미가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사건의 모티브만 가져왔기 때문에 영화에서 표현되는 구체적 사건과 인물의 캐릭터는 순전히 창작의 소산이며 이를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의견이다. 일면 수긍이 간다. 허나 문제는 사실과 영화를 혼동하여 역사적 실재까지 왜곡되게 이해하는 관객들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밀정' 이정출이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영화 ‘밀정’의 시대 배경은 1920년대이다. 일제강점기도 십 년 간격으로 통치 방식이 바뀌었다. 1910년 합방 직전에는 이른바 헌병 통치시대, 강압적 공포 정치였다. 학교 수업에 교사가 칼을 차고 들어와서 교육하였고 태형령을 만들어 재판 없이 현장에서 순사가 즉결심판을 하기도 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대내외에 독립의 기운이 샘솟는 듯했다.

그해 겨울에 발족한 비밀 결사단체가 바로 ‘의열단’이다. 김원봉을 필두로 하여 처음 인원은 열세 명으로 조직되었고 이후 단 한 사람도 조직을 배신하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국내 무장 독립투쟁의 대부분은 의열단의 활약이다.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을 비롯하여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어 영화 ‘밀정’의 첫 장면에서 오마주되었던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습격사건’, 탄압의 심장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졌다가 동지들 곁으로 살아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김익상의 의거 등이 의열단의 눈부신 전과들이다. 이런 ‘의열’의 전통은 임란 의병에서 시작해 일제의 국권침탈 시기의 의병으로 이어져 이후 민주화 투쟁으로 면면히 흘러왔다.

금방이라도 독립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여의치 않자 독립운동의 방법론에도 여러 이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독립이 되겠어?”(영화 속 이정출의 대사)라고 말하는 친일파들이 일제를 등에 업고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열단은 무장투쟁만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임을 만방에 선언한다.

일제를 공포에 떨게 한 의열단 김원봉의 현상금은 김구보다도 훨씬 높았다. 이런 의열단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일본 경찰은 밀정으로 조선인 이정출(송강호)을 선택한다. 그는 친일 조선인 경찰로 계급은 고위 직급인 경부까지 올라간 상태. 상부의 신임을 얻어 출세코자 의열단에 접근한다. 당시 의열단은 결정적 거사에 폭탄이 터지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실제로 일제 수탈기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터지지 않아 독립투사들의 아까운 목숨이 숱하게 희생되었다.

이에 의열단은 폭탄 전문가 헝가리인과 함께 경성으로 폭탄을 싣고 갈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 이정출 경부가 조력자로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극의 긴장감은 이정출이 마지막에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놓고 팽팽한 끈을 늦추지 않는다.

영화에선 의열단이 반입한 폭탄이 경성 연회장에서 폭발하여 많은 일본 장성과 친일파들이 몰사하는 걸로 나오는데, 실제는 모의 단계에서 사전 발각되어 주모자급들이 모두 검거되고 만다.

▲일제강점기 비밀 결사단체 의열단의 회의 장면.

이정출 역할의 모티브가 된 황옥 경부는 실존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황옥이 친일파였는지 아니면 독립군편 밀정 역할을 정말 완벽하게 한 건지 아직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황옥의 실제 재판 기록을 보면 “경찰 관리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 경시로 승진도 시켜주리라 믿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에선 이 역시 이정출이 완벽하게 일본 경찰을 속이는 걸로 그려진다. 어쩌면 황옥 자신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1983년 서울대에서 민주화 시위 중 도서관에서 추락해 숨진 황정하 군이 황옥 경부의 친손자임이 최근 밝혀지기도 했다.

영화 ‘밀정’의 숨어 있는 주인공은 역시 정채산(이병헌)이다. 영화 ‘변호인’에서도 어느 한 군데 노무현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누구나 주인공 변호사가 노무현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밀정’ 역시 정채산이 김원봉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득세하고 친일파가 활개 칠 때 김원봉이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고문을 당하고 풀려 나와 너무나 억울하여 사흘간 땅을 치고 통곡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원봉은 오랫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외면했던 인물이다. 월북하여 초기 북한정권의 고위직에 올랐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그는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는다.

‘밀정’을 통해 사실과 허구를 가리는 작업도 의미는 있지만 독립투쟁에 나섰던 이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고 어떤 조국을 우리에게 물려주기 위해 헌신했는지를 자문해 보는 게 이 청명한 가을에 더 값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김원봉과 부인 박차정이 주고받으며 사랑과 혁명을 꿈꾸었던 헝가리 민족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 한 구절을 헌사한다.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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