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4인치를 기다리는가, 아이폰SE

입력 2016-03-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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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가 미덕인 시대다. 나 역시 뒤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사랑도 일도, 쇼핑도 마찬가지였다. 오래된 것들은 친근하고 익숙해서 좋았다. 하지만 새롭고 낯선 것이 나타나면 거기에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6년을 사용해온 아이폰도 마찬가지였다.

아이폰5가 3.5인치를 벗어나 4인치로 커졌을 때, 나는 “화면이 커질 필요가 있을까?”라고 반대표를 던졌다. 그래도 신제품을 쓰지 않곤 못 견디는 성미라 어쩔 수 없이 아이폰5를 구입했다. 그런데 딱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본래 쓰던 아이폰4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다음엔 아이폰6 시리즈가 등장했다. 4.7인치의 아이폰6는 놀라웠고, 5.5인치의 아이폰6 플러스는 경악 그 자체였다. 나는 “이건 완전 몬스터야…”라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과감하게 아이폰6 플러스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손 조작은 커녕 두손 조작도 벅찬 대화면과 청바지 뒷주머니에도 넣기 힘든 존재감이 버거웠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쓰고 나니 예전 아이폰을 쳐다보면 폐소공포증이 생길 것 같더라. 널찍한 화면이 주는 만족감에 금세 취해버린 것이다.

지금은 4.7인치 아이폰6s에 정착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눈은 이미 새로운 디스플레이에 완전히 적응했건만 가끔씩 엄지손가락엔 향수병이 도진다. 한 손으로 제품을 쥐고 무심하게 화면을 가로지르던 평화의 시절(?)이 그리워져서다. 내 손가락이 짧은 탓도 있고… 하지만 아이폰은 물론이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도 5인치를 기본 사이즈로 하는 이 시대에 새삼스럽게 4인치를 그리워하는 건 나밖에 없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애플이 4인치 아이폰SE를 만들었다. 영리한 장사꾼 애플이 4인치 제품을 만들었다는 건, 이 사이즈가 먹힌다는 뜻이다. 4인치 시장을 등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수요가 파악됐으니 갑자기 유턴을 감행했겠지. 실제로 지난 해에만 3천만대 이상의 4인치 아이폰이 판매됐다고 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작은 아이폰’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4인치 고객의 상당수가 아이폰을 처음 접하는 사용자라는 흥미로운 데이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시장에는 이 비중이 더욱 높아, 과반수의 4인치 사용자가 아이폰 ‘뉴비’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안드로이드 진영에서 아이폰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4인치 아이폰의 허들이 더 낮고, 잘 먹힌다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패블릿으로 점철된 안드로이드 시장과 차별화를 둘 수 있는 포인트이기도 하고 말이다.

애플은 4인치로의 회귀를 부르짖는 사용자들을 위해 번외 모델 ‘아이폰SE’를 선사했다. SE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다. 스페셜 에디션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단발성 라인업일까? 후속작이 나온다면 어떤 이름으로 나오게 될까. 아이폰SE2는 이상할 텐데…

워낙에 루머가 많았으니, 아이폰SE의 공개를 앞두고 기어박스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사이즈만 줄인 게 아니라 사양도 바짝 줄인 저사양 모델일 것이다.” 혹은  “오로지 크기가 작아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양은 그대로 유지한 모델일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의견으로 말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저사양 모델에 한 표를 던졌다가 참패했고, 편집장J가 예언한 내용이 대부분 맞아떨어졌다. 돈내기 같은 건 안 하길 잘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아이폰SE는 대부분의 사양이 최신형 아이폰6s와 일치하는 고급기종이다. 불쑥 튀어나온 쪼끄만 녀석 치고는 스펙이 만만치 않단 얘기다. 아이폰6s와 동일한 A9 프로세서와 M9 모션 프로세서를 탑재해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카메라도 동일해 1200만 화소에 라이브포토, 4K 동영상 촬영까지 모두 지원한다. 3D 터치를 지원하지 않는 것 말고는 스펙적인 면에서 차이점이 없다고 보면 된다.

디자인은 아이폰5 시리즈와 같다. 뭐랄까. OLD & NEW가 공존하는 셈이다. 가장 좋은 프로세서와 가장 좋은 디자인(이 부분은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을 적절히 합쳤다고 봐도 되겠다. 애플이 이번 행사에서 강조한 ‘재활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은 없지만 본래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재활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냈다.

아마 지금쯤 한국엔 “아이폰, 혁신은 없었다”시리즈가 부활했을 것이다. 일부는 나도 동의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혁신적인 변화는 없었다. 직접 행사장에서 제품 발표를 들은 내 입장에서도 조금은 싱겁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폰SE 자체가 대단한 변혁을 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델은 아니다. 오히려 애플이 장사꾼 입장에서 실험 정신을 발휘했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4인치 아이폰을 그리워하는 사용자들을 위한 팬서비스 차원이 아니라, 4인치 제품이 여태까지 아이폰이 어필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장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은근하게 가격을 낮춰 인도 같은 저가 시장의 눈높이를 끌어올리려는 야심도 엿보이고 말이다. 나처럼 4인치 향수병을 호소하는 애플 마니아들의 충성도를 높이는 건 덤으로 따라오는 효과일 것이고. 참고로 아이폰SE의 가격은 16GB 모델이 399달러, 64GB 모델이 499달러.

물론 여기엔 여러가지 변수가 있다. 아이폰6s와 같은 두뇌를 품은 아이폰SE가 더 저렴한 가격으로 기존 라인업을 잠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일단은 판매량을 기다려보자. 조만간 ‘혁신은 없었을지언정 대박은 터졌다’라는 기사가 쏟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한국은 1차 출시국도 아닌데 성격급한 편집장…]

갑자기 한국에 있는 편집장 J에게서 아이메시지가 왔다. 오늘부터 본래 쓰던 아이폰6를 팔아버리고 집에 묵혀뒀던 아이폰5s를 쓰겠다는 내용이었다. 왜냐고 물으니 아이폰SE를 사기 전까지 4인치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위해서란다. 아이고… 기사 제목에 대한 대답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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