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낸시 레이건 여사, 아무도 못 말렸던 53년 남편 사랑과 헌신 회자

입력 2016-03-0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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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부인인 고 낸시 여사가 1986년 12월 백악관에서 반려견 렉스를 안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사진=AP연합뉴스

제40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고(故)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인 낸시 여사가 6일(현지시간) 별세했다는 소식에 생전 남달랐던 남편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회자되고 있다.

6일 현지 언론은 레이건 대통령 기념 도서관 대변인의 말을 인용, 낸시 여사가 이날 울혈성 심부전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향년 94세. 낸시 여사는 남편인 레이건 전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헌신으로 미국인에게는 가장 강인한 퍼스트 레이디로 평가되고 있다.

1921년 뉴욕에서 출생한 낸시 여사는 1940~1950년대 여배우로 활약하다가 1951년 당시 배우이자 영화배우조합 위원장이던 12살 연상의 레이건을 만났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계기는 다소 엉뚱했다. 낸시는 할리우드 배우 블랙 리스트에 자신과 같은 이름의 여배우가 올라 있다며 고용 유지를 위해 그 이름을 제명해 달라고 레이건에 도움을 요청하다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이듬해 3월 4일 LA의 산 페르난도 밸리의 리틀 브라운 교회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낸시는 결혼 후 배우 생활을 접고, 자녀 양육과 남편 내조에만 집중했다. 그는 “내 인생은 남편과 결혼했을 때부터 진정으로 시작됐다”며 남편에 대한 각별한 존경과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낸시 여사가 퍼스트 레이디로서 좋은 평가만 받은 건 아니었다. 그는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1967~1975년까지 ‘캘리포니아의 퍼스트 레이디’로 불렸다. 낸시는 남편이 주지사로 취임한 초기, 새크라멘토의 관사 건물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자 바로 부유한 교외의 저택으로 이사해 세간의 구설에 올랐다. 또한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 직후 암살 미수 사건을 겪을 당시, 면회를 엄격히 제한하고 대통령의 보호자 역할을 맡는 등 남편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낸시 여사는 점성술 맹신론자였다. 점성술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좋은 날·보통 날·피해야 할 날 등을 색으로 구분, 이로 인해 백악관의 일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급기야 백악관 수석 비서실장 도널드 리건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리건은 1987년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남편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남편이 연설할 때면 사랑이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많은 정치인의 배우자가 낸시를 흉내냈지만 ‘The Gaze(응시자)’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눈빛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1981~1989년에는 퍼스트 레이디로서는 이례적으로 ‘Just Say No’라는 반 마약 캠페인에도 앞장서며 가장 영향력 있는 퍼스트 레이디 중 한 명이 됐다. 특히 낸시 여사에 대한 비판은 그가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 보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취를 감췄다. 낸시 여사는 만년에 남편을 돌보기 위해 LA 벨에어의 집에서 지냈다. 알츠하이머 병을 앓던 레이건 전 대통령은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다가 2004년 6월 5일 고인이 됐다. 이후 낸시 여사는 알츠하이머 병에 대한 치료에 도움을 주기 위해 배아 줄기 세포 연구를 지원하기도 했다.

낸시 여사의 별세 소식에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 부부는 “낸시 레이건 씨의 생애에서 은혜를 느끼고 그 인도에 감사하고 있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이자 배우인 아널드 슈워제네거 씨는 “낸시는 나의 영웅 중 하나”라고 추모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는 도널드 트럼프 씨는 “진정 위대한 대통령의 아내이자 훌륭한 여성이었다”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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